며칠전 이 영화를 보고 무척 맘에 들어서 글이라도 하나 쓸까 했지만, 귀차니즘에 순순히 백기 투항해버린 쥔장. ㅡㅠㅡ 자주 가는 블로그들엔 새글이 없어서 지루함에 시달리다 무척 오랜만에 키드님 블로그에 가봤더니 이 영화에 대한 글이 있는 게 아닌가. '아, 이것도 일종의 계시인가'라는 다분히 미신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글을 쓰기로 결심. ㅡㅠㅡ
영화의 무대는 체제의 붕괴가 엄습해오는 80년대 동독. 잠재적 반체제인물로 의심되는 한 작가-연극배우 커플을 감시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한--체제를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던, 체제의 철저한 신봉자였던--비밀경찰이 이 커플들의 삶에 천천히 동화되는 과정을 굉장히 설득력 있게 그려낸 영화. 그리고 그 핵심에 자리한 모티프는 '타인과 연대하기'다.
키드님 말씀대로 이념을 뛰어넘는 예술/사랑의 호소력으로 이 영화를 이해해도 상관없겠지만, 어떤 가치의 보편성이란 건 공유된 경험과 학습을 바탕에 깔았을 때에만 존재하기 마련이라 믿는지라, 수십년의 경험과 학습이 쌓아올린 체제에 대한 맹신을 단지 '예술의 보편성'이란 이름으로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이 비밀경찰이 비즐러가 드라이만(작가)을 훔쳐보기 이전부터 이들 사이에는 이미 공유된 가치가 있었고, 영화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보여주기 때문에 설득력이 생기는 것. 달라도 너무 다른 삶을 사는 이들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 타인--가족이나 친구 등 삶의 일정부분을 공유한 특정 소수가 아닌 불특정 다수로서의 타인--에 대한 연대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비즐러의 삶을 유지시키는 것은 체제에 대한 환상이다, 현체제가 사람들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한다는 환상.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삶은 꽤나 공허하지만--비즐러는 영화 내내 단 한번도 웃지 않는다--이를 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자신의 불편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짐으로써, 즉 체제를 통해 타인과 연대함으로써 삶의 공허함을 견뎌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체제--보다 정확히는 그가 지닌 체제의 환상--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는 동정의 여지 또한 없다.
드라이만의 삶은? 드라이만이야 말로 체제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사랑, 부, 명예, 모든 것을 가졌고, 그는 체제 하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고 보기에 따라서는 행복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행하다. 그는 체제에 대한 환상이 없기 때문이다. 현체제가 자신 이외의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잘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는 불행하다. 그의 불행은 숙명이 아니고 선택의 결과인 셈이다, 타인과 연대하기로 한 선택의 결과.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은 만난다. 두 사람 다 자신의 삶 이상으로 타인의 삶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설령 자신이 그토록 맹신해온 체제와 맞서 싸울지라도 그에게 동화된다. 체제로부터 철저한 비호를 받아온 드라이만이 체제를 불신하는 것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체제로부터 행복을 보장받지 못한 타인들을 위함을 깨닫는 순간, 체제의 일부인 그루비츠나 헴프 같은 인물들은 실제로는 개인의 이익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자신과 연대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이란 영화의 제목도 숨결을 부여받는다.
@ 매우 훌륭한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쥔장은 여전히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은 판의 미로가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판의 미로는 최우수 작품상을 받아 마땅하다.
영화의 무대는 체제의 붕괴가 엄습해오는 80년대 동독. 잠재적 반체제인물로 의심되는 한 작가-연극배우 커플을 감시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한--체제를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던, 체제의 철저한 신봉자였던--비밀경찰이 이 커플들의 삶에 천천히 동화되는 과정을 굉장히 설득력 있게 그려낸 영화. 그리고 그 핵심에 자리한 모티프는 '타인과 연대하기'다.
키드님 말씀대로 이념을 뛰어넘는 예술/사랑의 호소력으로 이 영화를 이해해도 상관없겠지만, 어떤 가치의 보편성이란 건 공유된 경험과 학습을 바탕에 깔았을 때에만 존재하기 마련이라 믿는지라, 수십년의 경험과 학습이 쌓아올린 체제에 대한 맹신을 단지 '예술의 보편성'이란 이름으로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이 비밀경찰이 비즐러가 드라이만(작가)을 훔쳐보기 이전부터 이들 사이에는 이미 공유된 가치가 있었고, 영화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보여주기 때문에 설득력이 생기는 것. 달라도 너무 다른 삶을 사는 이들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 타인--가족이나 친구 등 삶의 일정부분을 공유한 특정 소수가 아닌 불특정 다수로서의 타인--에 대한 연대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비즐러의 삶을 유지시키는 것은 체제에 대한 환상이다, 현체제가 사람들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한다는 환상.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삶은 꽤나 공허하지만--비즐러는 영화 내내 단 한번도 웃지 않는다--이를 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자신의 불편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짐으로써, 즉 체제를 통해 타인과 연대함으로써 삶의 공허함을 견뎌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체제--보다 정확히는 그가 지닌 체제의 환상--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는 동정의 여지 또한 없다.
드라이만의 삶은? 드라이만이야 말로 체제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사랑, 부, 명예, 모든 것을 가졌고, 그는 체제 하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고 보기에 따라서는 행복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행하다. 그는 체제에 대한 환상이 없기 때문이다. 현체제가 자신 이외의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잘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는 불행하다. 그의 불행은 숙명이 아니고 선택의 결과인 셈이다, 타인과 연대하기로 한 선택의 결과.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은 만난다. 두 사람 다 자신의 삶 이상으로 타인의 삶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설령 자신이 그토록 맹신해온 체제와 맞서 싸울지라도 그에게 동화된다. 체제로부터 철저한 비호를 받아온 드라이만이 체제를 불신하는 것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체제로부터 행복을 보장받지 못한 타인들을 위함을 깨닫는 순간, 체제의 일부인 그루비츠나 헴프 같은 인물들은 실제로는 개인의 이익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자신과 연대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이란 영화의 제목도 숨결을 부여받는다.
@ 매우 훌륭한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쥔장은 여전히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은 판의 미로가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판의 미로는 최우수 작품상을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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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타인의 삶(The Lives Of Others,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 타인의 삶이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
Tracked from 설레임이라는 세 글자가 주는 벅찬 감동 2007/07/13 18:47 삭제" 선물하실 건가요?" "아뇨, 제가 볼 겁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타나 by 게오르그 드라이만 HGW XX/7에게 헌사합니다." - <타인의 삶>에서 드라이만이 책 첫 장에 새겨진 말. 누구나 '나의' 혹은 '우리' 등으로 시작하는 문장과 '남', 또는 '타인'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보면 온도 차이를 느끼게 마련이다. '타인의 삶'이라는 제목은 아주 차갑다. '타인'이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들의 '삶'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남 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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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데.
누나도 영화 보셨어요?
봤죠~ 강북민이 누리는 혜택 중 하나가, 멀티플렉스뿐 아니라 작고 좋은 영화 엄선해 틀어주는 극장이 주변에 잔뜩 있다는 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