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밤 3라운드 시작하기 전에 쓰려고 했는데, 교토 다녀오고 잠시 바빠서 오늘에야.

1) 1번 시드들의 몰락(?)

사실 1번 시드들이 조별 예선에서 부진한 경우는 의외로 흔하지만, 한 대회 한 라운드에서 1번 시드팀들이 이번처럼 동반 부진에 빠진 적이 있었나?

A조 프랑스 0 : 2 멕시코 (패, 합계 1무 1패)
C조 잉글랜드 0 : 0 알제리 (무, 합계 2무)
D조 독일 0 : 1 세르비아 (패, 합계 1승 1패)
F조 이탈리아 1 : 1 뉴질랜드 (무, 합계 2무)


2) 혼전 또 혼전

4팀1조 시스템에서 1번 시드팀들이 부진에 빠져 한 조에 절대 강자가 없는 경우 혼전을 피할 길이 없다. 위에 언급된 4팀 외에 H조의 스페인이 1라운드에서 1패를 먹으며, 2라운드 끝난 시점에서 네덜란드, 브라질만이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상태. 와중에 조 1위가 결정된 조는 단 하나도 없다. 사실 브라질은 조 1위할 것 같고, 이렇게 된 김에 스페인이 조 2위를 차지해서 16강전에서 브라질 vs 스페인 한번 봤으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스페인 vs 포르투갈의 이베리아반도전이 될 텐데, 스페인이 포르투갈 혼쭐내주는 것도 좋지만, 사실 포르투갈이(이라기보단 씨발도가) 스위스 같은 팀에 딜딜 말리며 짜증내는 꼴이 진짜 보고 싶단 말이지, ㅋㅋㅋ. 세계 축구계가 그만큼 평준화 된 까닭인지도...


3) 한반도의 몰락

한국(남한) 1 : 4 아르헨티나
북한 0 : 7 포르투갈

뭐, 설명이 필요없당. 2패, 1득점 11실점. -_-,, 70-80년대 월드컵의 재림인가.


4) 아프리카팀들의 계속되는 부진

남아공 0 : 3 우루과이
나이지리아 1 : 2 그리스
알제리 0 : 0 잉글랜드
가나 1 : 1 호주
카메룬 1 : 2 덴마크
코트디부아르 1 : 3 브라질

6전 2무 4패. orz 아프리카팀들 중 한팀도 16강에 못 나갈 것 같다. 그나마 가나가 희망이 있는데, 세르비아에 불의의 일격을 당한 독일이 죽자사자고 덤빌 거고, 아프리카 최강의 코트디부아르는 조가 잘못 걸린 데다가, 캐스팅 보트를 쥔 북한이 정줄 놓을 상대로 포르투갈을 고른 바람에... orz 최근 월드컵(90년대 이후)에서는 아무리 약체라고 해도 7:0으로 진 팀이 그 다음 경기에서 그 보다 더 큰 점수차로 깨진 일은 없다.


5)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왠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두눈 질끈 감고 "아아악!"하고 소리지르는 에투의 이 골 세레머니가 제일 인상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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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 존 메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그동안 화폐주의 시카고 학파(밀튼 프리드먼), 오스트리아 학파(루드힉 폰 미제스), 케인즈주의자(존 메너드 케인즈), 고전주의 경제학파(애덤 스미스)의 발언들을 하나씩 살펴 본 관계로, 이번주에는 오나전 반대편의 공산주의자 칼 맑스(Karl Marx)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까 했는데, 최근 유럽의 재정 정책과 관련해서 시장주의자(시카고+오스트리아 학파)와 케인즈 학파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관계로, 이를 반영해서 케인즈 이야길 다시 한번 하고 다음주에 맑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마 경제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발언 중 하나인 동시에 누가 인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도 다양하게 변화하는 한 마디가 바로 케인즈의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즉, "장기적으로 봤을 땐, 우린 다 죽고 없는 걸..."이라는 한마디일 거다. 그럼 우선 이 발언이 나온 맥락이 무언지 살펴보자.

사실 이 말을 케인즈가 언제 처음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24년이라고 돼 있는데, 대공황을 겪기 전인 이 당시엔 케인즈도 케인즈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발언의 맥락이 맞지 않다), 어쨌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공황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아담 스미스로부터 꽃피기 시작한 경제학은 신고전주의자들을 탄생시킨 한계 혁명(marginal revolution1)을 거치면서 단순한 사회학적 위상을 넘어서서 사회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과학으로서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런 경제학의 위상 성장에 급제동이 걸리는데 그게 바로 대공황이다. 당대의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컨셉은 비교적 간단했다. 국가 혹은 정부가 감놔라 대추놔라 개입하지 않고, 개개인이 자율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면, 국가 혹은 사회 전체의 규모로 봤을 때에는, 그 사회에서 생산한 재화는 그 사회가 다 소비할 수 있다는 거다.

물론 품목이나 산업별로 보면 과잉 투자로 인한 과잉 생산이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사회 전체의 모든 경제 활동을 높고 보면 과잉 생산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 어차피 한정된 물질적, 인적 자원을 이용하는 상황에서 사회 내의 모든 상품에 대한 수요, 공급, 가격이 평형을 이루는 조건이 있을 텐데, 어느 한 상품에 대한 생산 과잉은 다른 품목에 대한 생산 부족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렇게 평형이 깨진 부분에 대해서 생산 과잉량은 가격 하락을, 생산 부족량은 가격 상승을 유발시키고, 소비자는 가격이 하락한 과잉 생산된 상품을 조금 더 소비하게 되고, 반대로 생산자는 가격이 상승한 생산 부족 상품이 더 많은 이윤을 남길 거란 판단 하에 이들의 생산을 더 늘리려 할 거고, 결국 다시 평형점을 찾아간다는 이야기. 이런 시나리오에 따르면 생산 과잉이 일어난 특정 산업은 가격 하락으로 일시적 침체를 겪을 수 있지만, 경제 활동 전체가 슬럼프를 겪을 수는 없다.

게다가 누군가의 소득은 다른 누군가의 지출이고, 누군가의 소비는 누군가의 소득이란 점에서, 경제 주체 모든 이들이 소득과 소비를 모두 취합할 경우 이는 제로섬일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논리에 따라 사회 전체의 경제 주체들이 생산한 모든 것은 같은 경제 주체들이 소비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생산력이 소비력을 이끄는 공급주의 입장을 견지한다. 이를 비교적 잘 정리한 게 프랑스의 경제학자 세이(Say)로 이를 세이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이는 논리적으로 아주 간결하고 우아한 맛이 있어서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열병처럼 번지며, 경제학을 언제든지 과학의 반열에 올라서기라도 할 듯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1929년 주식 대폭락에 이어 거의 1930년대 내내 수요가 공급에 못 미치며 장기간의 지독한 경제 침체기에 접어들고 신고전주의 경제학 개념에 적신호가 들어온다.

이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경제학계의 구원 투수가 케인즈다. 그 이전까지 케인즈 본인도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신봉해 왔는데 1930년대의 대공황을 경험하며, 이론적으론 그럴 듯한데 실제로는 뭔가 안 맞는다고 느낀 그는 무료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ployment, Interest And Money, 줄여서 The General Theory)이라는 겁대가리없는 제목의 책을 1936년 내놓는다. 케인즈주의 경제학의 탄생이다.

그럼 케인즈는 그 동안의 이론에서 뭘 바꿨느냐? 일단 케인즈가 자신의 이론을 "일반 이론"이라고 명명한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의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가정한 "일반"은 틀렸다는 데에 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고용이 안정돼 있고, 경제가 일정한 속도로 꾸준히 성장하는 평형점이 "일반"적이고, 이로부터 간혹 부분적 산업에서의 생산 과잉이나 부족 등의 불규칙한 패턴이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조정기간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런데 케인즈는 이런 시각을 완전히 뒤틀고는, 경제학자들의 머릿속 세상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일반"적인 상황은 경제가 비평형 상태에서 끊임없이 이쪽저쪽으로 기우뚱거리고 있고, 그러다 간혹 운이 좋으면 신고전주의자들이 말하는 평형점에 있을 때도 있다는 거다.

그러면서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중요한 개념을 한가지 도입한다. 바로 총수요(aggregate demand)라는 개념이다. 그전까지 수요와 공급을 바라보는 시각은 굉장히 국지적인 차원에서였다. 즉, 특정 상품의 가격이 X원이라고 할 경우 생산자는 이를 몇개나 만들지, 소비자는 이를 몇개나 살지를 고민하는 차원에서의 공급과 수요였다. 사회 또는 국가 전체의 모든 소비자들이 시장에 존재하는 모든 상품들에 대한 모든 수요에 대한 별도의 고려 따위는 없었다. 이는 무조건 공급을 따라간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케인즈가 총수요와 총공급이 따로 놀 수 있다고 본 거다.

그 원인--케인즈는 비이성적인 동물과 같은 본능(animal spirit)이라고 생각했지만--이 뭐가 됐든 총수요와 총공급이 따로 노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고, 총수요가 총공급을 밑돌게 되면 바로 대공황과 같은 대규모의 장기적 경기 침체가 일어난다는 거다. 이렇게 경기 침체가 일어날 때, 신고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시장이 이를 수정하지 못하는 건 가격과 임금이 끈적하기 때문(price and wage stickiness)이란 것, 즉 가격과 임금은 한번 오르면 이는 쉽게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즉,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시장이 작동하려면 과잉생산된 상품들의 가격이 떨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들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임금도 같이 떨어져야 이들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서 과잉 생산량을 흡수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이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과잉생산된 상품들의 가격이 여전히 꽤 높다보니 이에 대한 수요가 계속해서 밑돈다는 뭐 그런 이야기.

그럼 이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여기서 케인즈에 따르면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논쟁의 핵심인 정부가 등장한다. 공급에 비해 밑도는 수요를 정부가 나서서 매우라는 거다. 즉, 정부가 재정정책을 이용하여(빚을 내서) 모자란 수요분을 채우면 이 돈을 받은 사람들이 돈을 쓰기 시작하고, 앞서 말했듯 한사람의 지출은 다른 사람에게는 소득이기 때문에, 이렇게 돈을 번 사람이 또 돈을 쓰고, 돈이 돌고 돌고 돌기 시작한다.

그래서 요약하면, 경제는 평형 상태에 있는 적이 없기 때문에, 정부는 불경기에는 재정 적자를 통해 수요를 창출하고, 경기 호황기에는 재정 흑자를 통해 수요가 넘치는 걸 막으라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하자 물론 시장주의자들은 기겁을 하고 나섰다. 정부가 경제활동에 적극 개입하라고? 허걱, 님하 무슨 농담을 해도 그렇게 무서운 농담을... 시장주의자들의 요지는, 정부가 재정 적자를 낸다는 건 누군가로부터 돈을 빌려서 사용한다는 이야기. 결국 경기가 되살아나려면 시장 내에서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돈을 빌려 써야 하는데, 그 돈을 정부가 이미 빌려가버렸기 때문에 쓸 수 없고, 결국 경기 침체를 더 장기화시킨다는 거다. 가만히 냅두면 장기적으로는 시장이 알아서 조정할 걸 정부가 개입해서 초치지 말라능!

그리고 이에 대한 케인즈의 화답이 바로 "장기적으로는 시장이 해결해 준다고? 암, 좋은 이야기지. 근데 대체 얼마나 기다리면 되는 거유? 우린 다 죽고 나서?", 바로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라는 한마디. 즉, 기다리면 시장이 해결책을 찾을 거란 걸 부정한 게 아니라, 그 해결책을 얼마나 빨리 찾을 수 있느냐에 촛점을 맞춘 거다. 그걸 기다리는 동안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경제학자들은 아니라고 그냥 기다리라고 하는 건 무책임하지.

그런데 케인즈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뒤틀어서 해석한다. "뭐, 어차피 언젠간 우린 한번 죽는 인생. 두번 죽는 거 아니니까, 우리 죽고 난 그 뒷일은 알 바 아니지. 그러니까 (정부가) 돈을 여기저기서 계속 빌려서 흥청망청 쓰라고!" 물론 케인즈의 발언은 이런 의미가 절대 아니다. 이 논쟁을 조금 더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 학파별 경기 사이클을 바라보는 관점, 악덕투자(malinvestment), 유동성 트랩(liquidity trap), 절약의 역설(paradox of thrift) 등등 다양한 개념을 설명해야 하는데, 이미 글이 꽤 길어진 만큼 이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만 현재 유럽,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정부가 재정 축소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폴 크루그먼을 비롯한 케인즈주의자들은 "정말 1930년대를 다시 한번 보잔 거야? 미쳤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고, 반대편의 시장주의자들은 "그래, 그래, 그래야 시장 신뢰(market confidence)가 회복되고, 경기도 회복되지"라며 박수를 치는 상황. 그리고 일전에 한번 소개한 적 있지만, 이 시점에서 꽤나 적절한 영상이라 다시 한번 소개.

Fear the Boom and Bust



1 스미스, 리카도 라인의 정통 고전주의 경제학이 경제학 발전에 초석이 된 건 맞지만 이들이 경제학에 대한 모든 부분을 제대로 설명해낸 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이아몬드에 비해 물이 훠~얼씬 인간 삶에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물이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싸다. 왜 그럴까?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그럴 듯한 답변을 하지 못하면서, 고전주의 경제학이 한때 그 존립의 위기를 맞는다. 그러다가 한계 효용(marginal utility)과 한계 가치(marginal value)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고전주의 경제학의 기초가 더욱 탄탄해지게 되는데, 경제학에서 이 한계(margin)의 개념의 도입은 꽤나 혁명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한계 혁명이라고 부르고, 이를 토대로 부활한 고전주의 경제학을 신고전주의 경제학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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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이 자책골을 넣었는데, 에인세는 자기가 골 넣은 마냥 세러머니를 한다. 물론 그냥 자기네 팀이 득점을 했다는 게 기뻐서일 수도 있지만 아르헨티나 선수들 중에서는 유독 에인세가 즐거워하는 것 같고, 카메라에도 많이 잡힌다. 그런데 이번만이 아니라 자책골이 들어가면 유독 세러머니를 요란하게 하는 선수들이 한명씩 꼭 있는데, 잘 보면 대부분 자책골을 넣은 선수와 가까이에 있었거나 볼경합을 하고 있던 선수인 경우가 많다. 에인세의 경우에도 공을 기다리며 공이 오는 타이밍에 발길질을 했는데 박주영이 끊어먹는 바람에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

아니, 그렇게 세러머니를 하면 자기 득점으로 인정이 되기라도 하는 거야? 왜들 그래? 요새처럼 고화질 카메라가 도처에서 촬영을 하는 세상에, 도대체 누가 골을 넣었는지 분간을 못할 리가 없잖아. 이와 유사한 현상으로, 소위 다이빙을 통해 파울을 유도하려는 선수들 중에서도 파울이 선언이 안 되면 유난히 화를 내는 애들이 있다. 예를 들면 포르투갈의 씨발도. -_-,, 요새 세상에 리플레이 몇번 보여주면 다이빙을 했는지 안 했는지 티가 다 나는 세상에서 왜들 그럴까? 자기 발(혹은 머리)에 맞지 않고 골이 들어갔다는 것쯤, 상대팀 선수와 접촉이 없었는데도 자기가 쓰러지고 있다는 것쯤 본인들이 제일 잘 알 거 아냐? 리플레이 한두번이면 뽀록 다 나는 세상에 왜들 그럴까?

추측을 하자면, 아마도 습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프로 축구 레벨이 되면 카메라가 십수대에서 수십대씩 돌아가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지만, 대부분의 축구 선수들이 축구를 시작해서 몸에 길들이는 레벨에서는 카메라가 없는 경우가 많다. 뭐, 요새야 가정용 캠코더도 워낙 흔해서 어릴 때부터 운동하는 모습들을 많이 비됴로 담아놓기 시작했지만, 지금 성년인 선수들이 어린 시절만 해도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을 테니. 즉, 카메라가 없는 곳이라면 그저 눈깜짝할 새에 심판들을 속여 넘기기만 하면 그만. 그런 환경에서는 상대팀 자책골도 내골로 만드는 속임수, 다이빙을 통한 파울 유도도 기술이다. 그리고 습관이란 무서워서 그런 기술이 몸에 밴 상태에서는 카메라가 있다고 갑자기 개버릇 남주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 가설을 테스트하기 위해서는, 카메라가 점점 하위(?) 레벨의 축구 경기에도 보급이 됨에 따라 이런 행동에 변화가 있는지 두고 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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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서 약팀이 강팀을 상대하는 일반적인 전술은 보통 선수비 후공격이다. 이는 "어쩌다" 이기면 좋고, 비겨도 그만, 그렇지만 지는 것 만큼은 피하자는 심정으로 상대적으로 무승부의 확률을 높이고, 이기거나 질 확률을 낮추는 거다. 이런 전략을 선택하는 이유는 약팀이 강팀이랑 맞불을 놓을 경우 비길 확률이 줄어드는 대신, 상대적으로 이길 확률은 조금 올라가겠지만, 질 확률은 그에 비해 더 많이 올라간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통계에 기반한 건 아니고, 그냥 설명의 편의를 위해 가상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약팀이 강팀과 맞불을 놓을 경우 이길 확률 : 비길 확률 : 질 확률이 2:2:6 정도라고 해보자. 이 경우 이기거나 비기는 경우에 만족할 수 있다고 하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확률은 (이길 확률 20 + 비길 확률 20 =) 40% 정도. 자, 그런데 선수비, 후공격을 함으로써 이길 확률 : 비길 확률 : 질 확률을 1:5:4 정도로 재배분할 수 있다면? 그러면 결과에 만족할 확률을 (10+50=)60%로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전략이 성공을 하면 좋은데, 이런 전략으로 맞서다가 실점을 할 경우 그 이후에 어떤 전략을 취하는 게 좋을까? 보통은 약팀이 실점을 하고 나면 보통 전술을 바꾼다. 예를 들어 어떤 시점, 예를 들어 경기 시작 30분 후에 한골을 먹고 1:0이 됐다고 해보자.

결국 문제는 1:0으로 뒤진 상황에서 남은 60분간의 경기 운영을 어떻게 할 거냐인데, 1:0의 점수가 된 처음 30분의 경기를 제외하고, 남은 60분간을 새로운 경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계속 선수비 후공격 전술을 유지할 경우, 남은 60분간의 경기에서 확률 분배는 1:5:4로 유지가 된다. 그런데 남은 60분의 경기 동안의 무승부는 이미 1실점을 한 상태에서 전체 90분의 경기 결과를 종합하면 결국 1:0 패로 기록되기 때문에, 남은 60분간의 경기에서 승리를 해야만 전체 90분의 경기에서 무승부 이상을 거둘 수 있다. 즉, 선제골을 내줄 경우 전략에 수정을 가하지 않는다면 무승부 이상을 할 확률은 10%, 패배할 확률은 90%가 된다.

반면에 상대팀과 맞불 전략으로 수정함으로써 남은 경기에서 2:2:6의 확률 배분을 갖고 경기에 임한다면 90분 경기에서 무승부 이상을 할 확률은 20%, 패배할 확률은 80%로 바꿀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약팀의 전략 수정은, 설령 그게 50보 100보일지라도 그나마 성공적인 경기 결과를 얻을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돌파구일 수도 있다.

따라서 기대하는 결과가 무승부 이상이라면 전략을 바꾸는 게 유효한 선택이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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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표현명 KT사장 "아이폰 보상판매 대신할 방안 고민"
기사 : '아이폰4 때문에…' 보험사 울상

Kmug의 댓글에서 봤는데 자동차 신모델 나왔다고 보상판매해주지 않잖아. 마찬가지로 전화기를 비롯한 각종 전자제품에 대해서도 보상판매를 해줄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명 사장이 고민을 하고 있는 데에는 물론 소비자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자하는 마음일 수도 잇겠지만 두번째 기사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태에 대한 사전 대비의 의미도 있을 거다. 물론 보험 사기가 일어나더라도 비용 부담은 KT가 아니라 보험사가 하는 거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것. 결국 이런 사태가 터지면 차후에 보험료 인상이 뒤따를 확률이 높은데, 소비자가 그 보험료를 납부하는 대상은 보험사가 아니라 KT이기 때문에 소비자의 눈엔 KT가 악역이 될 테니까.

아무튼 새로운 기종이 나왔다고 보상 판매를 안하냐는 불만을 토하는 풍경은 어딘가 좀 이상하다. 그리고 보험 계약 조건을 의도적으로 악용해서 새로운 전화기를 받아내는 것 또한 조금 이상하다. 우리는 돈의 이동 방향에 유난히 민감하기 때문에, 생산자나 기업이 소비자를 착취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빈번하지만, 그 반대의 소비자의 생산자나 기업에 대한 착취(라는 표현은 좀 이상하지만)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현실은 그렇지만은 않다.

사실 이런 현상에 대해 내가 할 말은... 음, Tyler Cowen의 말로 대신 : Stop Whining

요약하면 소비자 잉여를 즐기는데 집중하란 말이다! 제발 쫌!

KT든 SKT든 국내 통신업계에 불만이 많지만, 제품 출시 반년남짓만의 보상판매와 곤련해서는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입장. 소비자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소비자들 버릇나빠지게 부추기는 거--영어로는 spoiling한다고 하는데 우리말로 적당한 표현이 없나?--랑은 다르다고 보는 지라... 게다가 지나치게 소비를 부추기는 정책이기도 하고...

@ 물론 소비자 잉여란 건 주관적 가치 판단의 개념이라 주변 환경이 변하면 그 정도가 변하게 마련. 그렇지만 물건을 사던 시점에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새로운 제품이 언젠가는 출시될 거라는 사실--정도는 계산에 있던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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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football이란 대단히 직관적이고도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축구를 soccer라고 부르는 미국인들은 대체 뭔가 싶었는데, 축구가 중국어로 足球--우리식으로 읽으면 족구지만 중국식으로 읽으면 대충 쥐키유(zúqiú) 쯤 될까?--라는 사실을 알고는, 혹시 이게 미국으로 넘어가서 변형된 게 아닐까란 생각을 문득 했다. 물론 증거 따위는 없다. 이건 뭐 추측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100% 상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ㅡㅠㅡ

@ 쥐키유쥐키유쥐키유쥐큐쥐큐쥐켜쥐켜쥐켜쥐커주커주커주커쑤커쑤커쑤커쑤커 싸커! (뭐지? 글로 써놓고 보니 보리보리보리보리하다가 갑자기 쌀이 튀어나오는 이 느낌은? -_-a)
@@ The name of the game is football, you idi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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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0:1 패배와 동시에 월드컵 조별 예선 1라운드가 끝났다. 지금까지 뭔 일이 있었는지 간단 요약.

1) 파리 날리는 월드컵

남아공 사람들한텐 미안한 얘기지만, 부부젤라 소리, 영락없는 똥파리 소리다. ㅠ.ㅜ 경기장에서 부부젤라 불어대는 건 재미있는지 모르겠는데, 티비로 보고 있으면 중계하는 사람들 목소리가 안 들릴 지경. 뭐, 어차피 스포츠 해설치고 도움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게다가 일본어로 하는 해설 알아듣지도 못하니 안 들린들 상관은 없지만, 그렇다고 파리 날리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겠뉭? orz 님들아, 자제효. 그렇다고 위원회가 나서서 부부젤라 전면금지라며 경기장 입장하는 사람들 수색해서 부부젤라 압수하는 뻘짓은 사양.


2) 축구가 지루하다고? 풋, 정말 지루한 축구를 아직 못 보셨구만.

16경기 25골, 경기당 1.56골, 이거 뭐 이래? orz
참고로 지금까지 경기당 평균 골수가 역대 최소였던 대회는 1990년 미국 월드컵으로 경기당 2.21골.
정녕 독일만이 새로운 월드컵 공인구 자블라니의 수혜자인가? (독일은 호주에게 4:0으로 승리.)


3) 우리가 아프리카에 있는 걸로 보이니?

축구는 홈어드밴티지가 꽤나 크게 작용하는 편이라 지금까지 월드컵 개최국은 물론 개최대륙들이 그간 많은 수혜를 봐왔는데, 이번엔 뭔가 이상하다.

남아공 1 : 1 멕시코 (무)
아르헨티나 1 : 0 나이지리아 (패)
알제리 0 : 1 슬로베니아 (패)
세르비아 0 : 1 가나 (승)
일본 1 : 0 카메룬 (패)
코트디부아르 0 : 0 포르투갈 (무)

종합 전적 : 1승 2무 3패


4) Chronic Overachiever vs Chronic Underachiever

대회전의 팀전력에 대한 평가 따위와 관계없이 월드컵만 되면 펄펄 나는 독일은 이번에도 4:0으로 호주를 손쉽게 제압하며 chronic overahiever의 위용을 과시.

피파랭킹은 브라질이 1위 탈환을 했음에도 (얘넨 정말 1위 지겹지도 않나?) 많은 이들이 이번 대회 가장 강력한 우승 호보로 유로 2008 우승국인 무적함대 스페인을 뽑았지만, 월드컵만 나왔다하면 만성 부진에 시달리는 스페인은 이번에도 그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스위스에 0:1로 패배.

역시 되는 놈은 되고, 안 되는 놈은 안 되는 것인가, ㅋ. 뭐, 월드컵 만성부진으로 말하자면 잉글랜드도 만만찮지, 사실.

Oopsie, Daisy


음, 이게 단가? 뭔가 매우 싱거운 느낌이군.

아, 그래 이제 2라운드가 시작하는 마당에 이 얘길 안 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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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월드컵
관련글 : The Silent Treatment: Saying “No” by Saying Nothing.

이곳에서 하고 있는 일이 대충 정리가 돼 가는 단계라 이곳 연구실 책임자 및 나랑 같이 일하는 동료가, 근 8달간 도쿄에만 머물렀는데, 뒷정리는 자기들한테 맡겨 놓고 일본 여행이라도 하라길래, 주말에 교토나 다녀올까 한다. 혹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미처 생각치 못했는데, 한국서 교수님이 시킬 일이 있지는 않을까 해서 어제 교수님한테 주말에 바람 좀 쐬고 와도 되겠냐고 이메일을 보냈는데 답이 없네.

오늘 다른 일로 이메일을 하나 또 보낸 게 있는데 그거엔 제깍 답이 왔는데... 흠, 이것은 Saying "no" by saying nothing인가? ㅡㅠㅡ

그렇지만 나는 확인/독촉을 위해 두번째 이메일을 보내는 대신 그냥 Saying "yes" by saying nothing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교토 가서 뭐할까? ㅋㅋ

@ 주말인데 뭐 그런 걸 물어보냐고? 글쎄, 주중 주말의 개념이 없어진지 오래기도 하거니와, 귀국할 즈음이 돼가니--내 생각엔 그럴 일은 없어 보이지만, 교수님이 보기엔--한시간이라도 더 짜내서 일을 마쳐야 하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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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을 쓰다보니 길어져서, 결국 새글로... ㅡㅠㅡ

관련글 :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대체 어떤 세상?

이하는 너불형의 두번째 댓글 중 일부
− 그럼 이제 "물질만능주의"를 보세. 간단히 말해서 "돈이면 다 돼"라는 얘기지? 이런 사고방식이 나타나는 기본적인 이유는, 현 시스템에서 축적된 자본의 힘이 다른 모든 것의 힘을 압도하기 때문이라네. 대표적인 예로는 작년 말의 소위 "원포인트 사면" 사태를 들 수 있겠군; 이런 시스템을 다른 말로는 "금권에 의한 약육강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네. 아닌가? :)

= 인정.

− 나도 물론 체제가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는 식의 환타지는 안 가지고 있삼. 그렇지만 뭔가 인간다운 가치라는 건 종종 본성에 반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본성/본능적 충동을 제어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결국 온갖 제도와 체제의 목적이잖아?

= 인정.

− 그러니 누군가 신자유주의나 물질만능주의 따위를 비판할 때, 이건 당연히 인류보완계획 따위 얘기가 아니지; 또한 아예 자본주의를 때려치우자는 얘기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겠고. 그냥 좀 이게 너무 "야만적"이라능? :) 우리가 물리적 힘을 자제하고 약육강식 상황을 벗어난 것처럼, 같은 식으로 더 나은 제도들을 고안/수정하도록 노력하자고 한다면 -- 글쎄 뭐 이게 그렇게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ㅋ

= 이부분도 인정.
여기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은 건... 문제를 좀 지나치게 단순화한 감도 없잖아 있지만, 어찌됐건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물리적 힘에서 중간에 종교, 혈통 등등 다양한 단계를 거쳐서 일단 현재는 경제적 힘이 짱 먹는 시대로 오긴 왔는데, 본질은 그대로고 결국엔 이놈에서 저놈으로 권력을 셔플링하고 있는 것뿐인가란 의문 때문인가? 뭐, 역사란 원래 그러면서 (아주 더디게) 발전하는 거겠지만서도...

암튼 간에 지금 우리가 어디 와 있는가와는 별개로, 또 현실 세계에서 어디까지 실천 가능한지는 지켜 볼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권력을 이놈한테 뺏어서 저놈한테 안겨주는 것보다는 권력을 분산시키는 게 이상적인 방향일 텐데... 민주주의의 현실이야 어쨌든, 민주주의의 정신이란 건 그래서 꽤나 고상한 맛이 있는 거고.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자본 권력을 통째로 들어다가 누구에게 이양하느냐가 아니라, 자본 권력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쪼개느냐인데,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법은 정부가 (각종 규제를 통해) 자본을 견제한다 정도? 그런데 실제로 "정부가 그래야 한다"는 것과 "정부가 실제로 그러하다"는 거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어서 골치.

보통 독일이나 북유럽형 모델--프랑스도 이미지는 좋은데, 실제로는 정부가 자본 권력을 견제한답시고 막대한 부채를 떠안는 바람에 결국엔 그 부담을 세금이나 인플레이션 형태로 서민들이 떠안을 수밖에 없어서 장기적으로 봤을 땐 불안한 상태--이 비교적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받는데, 그런 모델을 지향한답시고, 지금 시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정부에 자본을 규제할 권한을 줘봐야 (결국은 자본을 뒤에 둔) 각종 이익집단의 전쟁터가 될 가능성이 농후. 그리고 최종 승자가 정부를 자기 주머니에 쏙. (뭐, 대한민국 정부는 이미 S사 주머니에 쏙 들어간 것 같긴 하다만...)

뭐, 이런 예야 찾으러 들면 얼마든지 있지만, 오늘 마침 The Economist의 쟁점 중 "중국 위안화 절상해야 하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의견이 하나 떴길래 이 녀석으로 선택. 일단 링크:
Debate: Should China allow the yuan to rise?
요점만 추리자면, 중국이 수출 중심 성장을 위해 위안화를 너무 싸게 너무 오래 붙잡아둔 바람에 중국내 인플레이션 징후가 슬슬 나타나는 와중에도 왜 중국이 위안화 절상을 뭉게고 있느냐? 이익집단(수출 업체들)의 로비(?) 때문이라능... 너불형의 첫 댓글에도 언급됐듯, 공산주의란 이름을 달고 나왔던 놈들은 다 병맛 날리고 망한 것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이유.

이런 류의 문제는, 사실 정의감에 불타는 개인이 고생고생 끝에 정권을 잡아 봐야 그 기간 동안은 잠깐 갖가지 제도 개혁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건 일회성 이벤트 밖에 안 되고, 언어로 표현되는 외형적 체제와는 별개로 정부(라고 읽지만 실제로는 행정에 관여하는 사람들)가 이익집단이 제공하는 금전적 이익을 다 뿌리치고도 소위 "옳은 일"을 하게 만드는 인센티브를 누가 어떻게 제공할 거냐인데, 민주주의 체제에서야 결국 정부가 이상한 짓하면 "선거로 심판"을 해줘야 한다는 사실로 귀결.

그런데 한국 사회는 정부의 이상한 짓에 당하고도 선거로 심판을 안 하는 건지, 내가 생각하는 정부의 이상한 짓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지, 어찌됐든 맨날 똑같은 녀석들만 주구장창 예뻐서 다시 한번, 미워도 다시 한번. 결국 사람들이 바뀌면 시스템도 바뀌는데, 또 한편으론 시스템이 바뀌면 사람들도 바뀌는 법인지라, 이 기이한 악순환의 고리 중 어디를 잘라야 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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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자본주의나 물질만능주의가 인간성을 파괴한다는 이야기의 취지는 십분 이해하겠는데, 이걸 받아들이더라도 항상 그 다음이 문제다. 왜냐하면 사람이 금전적 손익을 초월한 사랑, 우정, 박애에 감동하기는 쉽지만, 그런 거에 감동하는 것과 실천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

계산적 인간관계의 원흉이 돈이나 물질이라고 해서, 이것들 없이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뭐, 아주 극단적인 경우라면 물물교환을 하면 되니 돈이나 자본은 없애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돈이 없어진다고 비용의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예를 들어 내가 텃밭에다 토마토 농사를 지어서 이웃들에게 나눠줄 경우, 이웃들로부터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토마토를 생산하는 비용, 소위 시간과 노력이 들지 않은 건 아니다.

보통은 돈을 바라지는 않더라도 이웃들이 고마워하고 맛있게 먹어주기를 기대하고, 또 보통은 (설령 맛은 좀 없더라도) 이를 고마워 한다. 이는 내가 시간과 노력이라는 형태로 들인 비용을 상대방이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비교적 자연스러운 행위로, 이웃들이 그런 나의 비용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사람에 따라선 섭섭해하기도하고, 불쾌해하기도 하고, 다양한 반응이 나타난다.

본질에는, 내가 들인 비용을 상대방이 인정해주느냐의 문제가 놓여 있는 거고, 금전 거래는 (다소 친밀감은 떨어지지만) 이런 비용을 인정해주는 한가지 형태에 불과하다. 돈이냐 아니냐가 아니고, 상대방의 비용을 흔쾌히 인정하고, 내가 상대방을 위해 비용 부담을 할 준비가 돼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문제야"라며 뒤엎어서 사회주의든 제3의 어떤 체제든 만들어내봐야, 그 시스템 속에서 금전적 손익을 초월한 인간관계란 허울에 불과, 결국에는 "우리가 째째하게 돈 몇푼 따지는 그런 사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돈(비용)은 내가 기꺼이 낼께"보다는 "우리가 째째하게 돈 몇푼 따지는 그런 사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돈(비용)은 너가 기꺼이 지불할 거지?"의 형태로 남의 골수를 뽑아먹는 기생충만 만들어낼 뿐.

사실 이런 풍경은 이미 우리가 생각하거나 원하는 것보다도 훨씬 자주 벌어지고 있는데, 재산 분배를 놓고 형제들이 싸우는 것도 "야만스럽게말야 형제들끼리 재산 갖고 싸우면 안 되지.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이렇게 재산을 나누는 게 정당한데, 설령 네가 보기엔 정당하지 않더라도) 치사하게 꼬치꼬치 따지지 말고 그냥 이것만 먹어"라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 형제들이 한 사람도 양보 없이 전부 다 이런 포지셔닝을 취해버리면 싸움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잖아?

결국 문제는 사회 전반에 걸친 "우리가 째째하게 돈 몇푼 따지는 그런 사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돈(비용)은 너가 기꺼이 지불할 거지?"라는 인식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째째하게 돈 몇푼 따지는 그런 사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돈(비용)은 내가 기꺼이 낼께"로 전환시킬 수 있느냐인데 이게 정말 자본주의 vs 사회주의의 문제일까?

@ 물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계산적 인간관계의 틀 안에 있기 때문에, 금전적 손익을 초월한 인간관계조차도 "우리가 째째하게 돈 몇푼 따지는 그런 사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돈(비용)은 너가 기꺼이 지불할 거지?"의 형태를 띌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확신은 잘 안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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