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김연아 선수 올림픽 금메달 딴 거 축하할 건 축하하고 이야길 시작하자.

온국민이 한 스포츠 선수에게 이 정도로 열광하기는 90년대 후반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수준급 활약을 펼치던 이후로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에 특정 선수는 아니지만 2002년 월드컵을 빼놓을 순 없겠지.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인(들)이 국제적으로 좋은 활약을 펼친다는 거다. 집안에서 판검사가 나오면 그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사촌할 것없이 그걸 뿌듯해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거랑 꽤나 유사한 심리일 거다. 물론 가족들끼리 모였을 때도 즐거워하며 이야기하겠지만, 그 뿌리에는 결국 자신이 속한 집단--판검사의 예에선 가족, 김연아의 경우엔 국가--이 혹은 그 집단의 구성원이 그 이외의 집단이나 집단의 구성원에 비해 상대적 우위를 점한다는데에 있다.

이는 물론 진화론적으로 지극히 당연한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이 작은 부족 단위로 정착하여 농경 사회를 이루면서, 힘에 의한 권력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1 이는 도시 내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도시가 팽창함에 따라 주변 도시들과 힘겨루기를 하게 되면서 더더욱 중요해진다. 이 당시에 내가 꼭 힘이 세지 않더라도 힘이 더 센 집단에 속한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하나의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사회가 팽창함에 따라 애매해진다. 힘센 사람, 예를 들면 오늘날 박찬호와 나 사이의 사회적 공간은 만년전 우리 부족장 및 부족원들과 나 사이의 사회적 공간에 비하면 엄청나게 팽창했음에도 불구하고--앞서 <뇌와 인류>란 제목의 글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그 넓디 넓은 사회적 공간은 200년 정도 묵은 국가관이라는 비교적 새로운 개념 하나로만 가득 메워버리고는, 이 만년 묵은 뇌는 여전히 '박찬호는 한국인, 나도 한국인,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편, 다른 편인 니들은 날 함부로 보면 안 돼'라고 똑같이 반응하고 있는 거다. 지난 200년 새에 근대 국가관이 왜 생겼는지는 또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아무튼 뭐, 진화의 속도란 게 원래 좀 느린 편이라 별 수 있나, 꽤나 정상적인 반응이다. 특히 그동안 한국 사람들 중에 다양한 스포츠에서 세계 1위를 해본 사람은 제법 많았지만, 페더러나 우즈처럼 시대를 초월한 수준은 김연아가 처음이니까.

자, 여기서 이야기를 살짝 비틀어 보자. 내가 세살 때 아빠는 웬 여자와 눈이 맞아 엄마, 우리 형, 나를 버리고 집을 나갔다. 내가 한 열두살 때까지는 생일 때면 그래도 생일 카드 한장 정도는 보내주더니 어느날인가 그것마저도 끊어졌다. 엄마는 어떻게든 형과 나를 모두 대학에 보내고 싶어하셨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됐던 걸 잘 알던 형은 형보다 공부를 잘 하던 날 학교에 보내기 위해 결국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그렇게 뼈빠지게 일해서 나를 대학까지 뒷바라지한 끝에 난 아주아주 성공한 청년 사업가가 되었다. 나의 이런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지 얼마지 않아 웬 사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빠였다. "이 녀석 잘 컸구나, 허허허"에서 시작해서,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 아들아. 그렇지만 아빠 얘기도 좀 들어봐"로 이어지는 뻔한 뒷이야기... 경제학에서 무임 승객 문제(free rider problem)라고 하는데, 어느 사회에서고 단물만 빨아먹는 사람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라, 무임 승객이 있다는 사실은 꽤나 정상적이지만,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임 승차를 하려 한다면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원래 피겨 스케이팅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김연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이 두가지의 복합이라고 보면 되겠다. 김연아가 나와 같은 한국인이란 게 자랑스러운 건 만년 묵은 뇌가 삽질 중인 거지만, "애국가가 나오면 눈물을 흘릴까요"라고 말하는 건 김연아에게 우리의 존재를 잊지 말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무임 승차 중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이 무임 승차가, 축구에 대해서는 조금 냄비근성이 있긴 해도 그래도 프로축구도 있고, 언론에서도 축구 이야기는 수시로 하는 점을 감안하면 월드컵 때는 조금 덜하고, 박찬호 때는 월드컵 때에 비하면 조금 더 심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는데, 김연아 때에 가서는 중증이 됐다. 문제는 앞서 말한 두가지 전혀 다른 증상을 사람들이 동일한 증상으로 받아들인다는 데에 있다. 앞서 말했듯 만년 묵은 뇌가 삽질하는 건 비교적 정상적인 반응이고 그 자체만으로는 큰 해악이 없지만, 무임 승차를 원하는 건 아주 아주 바람직하지 않고, 당연히 서로 지적을 해줘야 정상적인 부분임에도, 두가지를 동일화하다보면 무임 승차하는 행위를 정상적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거다. 이미 몇년 묵은 이야기지만 황우석 사태 때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났었는데, 황우석이란 과학자가 한국에 있어서 자랑스럽다 + 황우석의 과학이 국가에 엄청난 부를 안겨줄 거다--물론 구라로 판명이 나긴 했지만--라는 무임 승객 심보가 여과없이 드러난 케이스에 해당한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자, 아래에 자가 진단 테스트가 있습니다. 자가 진단들 해보십시오.

자가 진단 해보기


@ 위 자가 테스트 결과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면 고혈압, 심장마디, 뇌경색 등의 질환이 찾아올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 다시 읽어보니 글 쓰다 귀찮아서 급하게 둘둘 말아버린 티가 너무 나는데. -_-a


1 물리적 힘에 의한 권력에는 뭔가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느낌이 있지만 사실 먹을 걸 찾아 가젤과 물소를 쫓아다니고, 다 익은 열매가 있으면 따먹던 오히려 훨씬 더 원시적인 시절엔 권력층과 피권력층의 관계가 오히려 형성이 되질 않는다.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작은 무리를 지어서 계속해서 떠돌아다닌다는 점과 잉여--이말을 요새 인터넷에서 잘못 쓰면 오해받는데 -_-a--의 음식물을 축적할 여력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먹을 걸 못 구한 힘센 사람이 먹을 걸 가진 다른 사람의 것을 한시적으로 뺏어 먹을 순 있어도, 언제 어디서 또 만날지 알 수 없는 관계 속에서 토착적인 상하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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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 인정

일상다반사 2010/02/26 17:20
연아, 이쯤되면 피겨계의 로저 페더러 또는 타이거 우즈. (물론 타이거 우즈의 사생활은 빼고 논하자. -_-a) 그렇지만 왜 전 국민이 열광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 아니, 잘 알지만 제발 좀 안 그랬으면 좋겠다. 물론 피겨 스케이팅을 좋아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피겨 스케이팅 다들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잖아. ㅡ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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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싸, 이쯤되면 나도 저 아저씨들이랑 동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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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라니, 난 아직 20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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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난, 아...아저씨 맞군. orz


@ 참고로 사진들은 각각 올림픽, 2010 호주 오픈, 2008 US 오픈 때로 각 선수들에게 가장 최근의 메이저 대회 우승 당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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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http://failblog.org/2010/02/23/tag-fail/

세탁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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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에 색칠한 게 아니고, 품종이 다른 쌀을 심어서 그렸다고 함. 이 사람들에게 농사는 여가인가...(라고는 해도 이게 하나의 관광 상품인 듯.)

정보제공: Tyler Cowen의 Marginal Revolution
원본사진출처: http://www.hoax-slayer.com/japanese-rice-crop-art.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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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일본
온국민이 김연아, 응? 누구? 김연아에 열광하는 사이에, 나는 테사 버츄한테 열광하기로 했다. ㅡㅠㅡ 응? 얘야 말로 누구?

어제 저녁에 퇴근해서 올림픽 하일라이트나 볼까하고 TV를 딱 틀었는데, 이 장면이 화면에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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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완전 호감.

피겨 스케이팅이고, 아이스 댄싱이고 전혀 관심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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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가씨한텐 관심 있지. ㅡㅠㅡ 무...물론 포샵질에 낚였을 가능성도 무시할 순... -_-a

사진제공: http://relish.myraklarman.com/archive/tessa-virtue/


@ 아이돌(?)을 우러러 보는 게 아니고, 내려다 봐야 하는 나이라 좀 아프다. -_-,,
@@ 화장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인상이 많이 달라 보이긴 하는데, 아래 사진 보면 Nicole Kidman이랑 Anna Friel을 섞어 놓은 얼굴 같기도 하고... 근데 이런 거나 비교하고 있는 거 보면, 나 할 일 별로 없나봐. 사실 바쁜데... ㅡ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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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와 인류

일상다반사 2010/02/23 15:35
자, 다음의 시나리오들을 각각 생각해보자.
  1. 시대는 나치 독일. 유대인인 당신은 독일군의 눈을 피해 한 가정집 지하에 다른 유대인들과 숨어있는 가운데 독일군이 집에 들어와 수색을 시작했다. 아직 젖도 못 뗀 당신의 아기를 안고 있는데, 아기를 보니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 정황상 아이의 숨을 틀어막아 아이를 죽이거나, 독일군에게 발각돼 모두 죽거나 둘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의 아이를 죽일 수 있겠는가? 설령 당신의 손으로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옆사람이 아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면, 그 사람이 죽이게끔 아이를 넘겨줄 수 있겠는가?

  2. 고장난 열차 안에 5명의 사람이 갖혀 있는데, 이 열차가 철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문제는 완공되지 않은 철로의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다. 당신 앞에 레버가 하나 있는데, 이 레버를 당기면 열차가 다른 철로로 옮겨가서 무사히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문제는 이 다른 철로에는 현재 뭔가 작업을 하고 있는 귀머거리 인부가 한명 있다. 레버를 당기지 않을 경우 열차 안의 5명이 죽게 생겼고, 레버를 당긴다면 철로에서 작업하는 인부 한명이 죽게 생겼다. 당신은 레버를 당기겠는가?

    이번에는 조금 비슷하지만 또 조금 다른 문제를 생각해보자. 역시나 5명의 사람이 갖혀 있는 고장난 열차가 낭떠러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 당신은 아주 거구의 사나이와 함께 그 철로 옆에 서 있다. 당신이 그 사나이를 철로로 밀어버리면 열차와 사나이의 충돌로 열차를 멈출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사나이를 밀겠는가?

  3. 당신이 엄청나게 비싼 옷을 입고 강가를 거닐고 있는데, 강물에 어린 아이가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다. 강물에 뛰어들어 어린 아이를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 아이를 구해주고는 집에 와서 우편물을 확인해보니, 당신이 입고 있던 양복값의 10분의 1만 기부를 하면 지구 반대편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에게 1년치 식량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은 기부를 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각각의 경우 여러분의 대답은?

다양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번의 경우 아이를 죽인다와 죽이지 않는다가 반반 정도라고 하는데, 실제로 아이가 있는 사람들만 대상으로 할 경우 죽이지 않는다가 더 많다고 한다. 2번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레버는 당기겠지만, 사람을 철로에 밀어넣지는 않겠다고 하며, 3번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비싼 옷을 버리게 되더라도 강물에는 서슴없이 뛰어들겠다고 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호주머니를 선뜻 열겠다는 사람의 수는 그보다 현격하게 작다고 한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당연한 거 아냐? 뭐, 그렇게 놀라운 결과는 아닌데, 그렇다고 논리적으로 쉽게 설명되는 결과도 아니다. 일단 2번에서 주어진 두가지 상황에서 논리적으로는 둘다 예라고 하던가 둘다 아니오라고 하는 게 일관성 있는 대답이다. 그리고 2번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1번에서 또한 아이를 죽일 수 있어야 일관성 있는 태도다. 물론 이쯤에서 '원래 이 세상은 논리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지 않는다고'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좀 너무 편리하잖아.

온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려면 아직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과학 기술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할 수 있다. 1번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져놓고, 그 사람들 뇌의 사진을 찍어보면, 아이를 죽이겠다고 대답하는 사람들과 아이를 죽일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 실제로 주로 이용하는 뇌의 부위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 더 신기한 건, 3번 질문에서,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겠다고 대답할 때와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를 위해 성금을 하겠다고 대답할 때, 두 경우 모두 피상적으로는, 내가 모르는 아이를 위해 약간의 경제적 희생을 각오한다는 동일한 논리구조를 따른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결정을 내리는 뇌의 부위는 다르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물론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인간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이에 맞춰 인간의 뇌 또한 진화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힘을 얻고 있다. 무슨 말이냐면, 인간이 동굴에 살면서 사냥과 수렵을 하던 시절의 개체 혹은 종족의 생존 개념과 오늘날 개체 또는 종족의 생존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는 거다. 수천, 수만년전의 인간에게 인류, 지구 반대편, 대의 따위의 개념은 없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건져주면 되고, 맹수를 발견하면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무리지어 사냥을 했으면, 고기를 나눠 먹으면 됐고, 그걸 뺏어가려는 외부인이 있으면 힘을 합쳐 물리쳤다. 내 생존의 아군과도, 적군과도 언제나 눈을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눈빛을 교환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류란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만나는 사람들 전부일 뿐이고, 인류의 생존을 위해 내가 해야 하는 행위의 경계는 분명했다. 나의 유전자를 품고 있는 아이의 눈빛을 보고도 그 아이의 숨통을 끊을 수는 없는 일이고, 무기력하게 물살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사람의 눈빛을 보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본능의 문제이지 논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의를 위해 내 아이를 죽이고, 인류의 기아 문제를 위해 내 지갑을 여는 일 따위는 오늘날의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얼핏보면 똑같아 보이는 문제를 놓고도, 무의식은 이 문제들 사이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해결할 문제와 추상적 사고로 해결할 문제라는 경계를 긋는다. 레버를 당기는 건 5사람의 목숨과 1사람의 목숨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추상적 문제지만, 사람을 철로로 미는 건 내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을 살인해야 하는 본능적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뇌가 각 부위별로 그 기능이 나뉘어서, 각 부위가 결투를 벌이는 거면, 더 어찌해볼 수 없는 거 아니냐고? 물론 이미 어떤 사람의 뇌의 각 기능이 충분히 발달했다면, 그 사람의 행동 양식을 바꾸기는 쉽지 않겠지만, 아직도 희망은 있다.

다음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갑에게 을과 나눠 가지라며 100달러를 주는데, 이때 조건이 한가지 있다. 100달러를 갑과 을 사이에 몇 대 몇으로 나눌지는 1달러 단위로 갑이 결정하되, 을이 이 비율에 수긍하면 그 비율에 따라 두 사람이 돈을 나눠가지면 되고, 을이 이 비율을 거부하면 돈을 내가 도로 회수해간다는 조건이다. 이 경우 단순 논리만 따지면, 갑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갑=99 : 을=1의 비율을 제시하고,을 역시 갑이 우선권을 쥔 상황하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방법을 모색하려 한다면 1달러 > 빵달러니까, 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게 합리적이다. 그렇지만, 갑이 실제로 이런 조건을 제시하면 을은 열에 아홉 거부해버리고 만다. 흔히 말하는 괘씸죄가 성립했다고 볼 수 있겠다.

재미있는 건, 이 실험(?)을 해보면, 더 파편화되고,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되는 소위 선진국 사람들은 5:5 내지는 6:4 정도의 비율로 돈을 성공적(?)으로 나눠 갖는데 반해, 여전히 주변 사람들과의 유대가 중시되는 개도국이나 후진국 사람들은 오히려 8:2, 9:1 같은 편파적(?)인 비율로 돈을 나누려고 하다가 괘씸죄에 걸려 거부당하는 경우가 더 잦다고 한다.

이는 선진국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사랑이 더 넘치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이 기계화된 사회의 부품으로 전락함으로써, 인간미가 파괴되고 있다고 소리 높이고 있느냔 말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웃과 눈빛조차 안 마주치는 파편화된 사회가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이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 넓은 인류를 향해 확대하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나도 예전엔 그랬다 -_-a) 이게 그렇게 단순히 가족, 친구, 동향사람, 동포 등으로 그어진 임의의 경계선을 한없이 넓힘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변화된--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이 거대해진--사회 구조가 요구하는 변화된 삶의 규칙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규칙을 체화하는데 있다. 현생 인류 사이에서 진화적으로 뇌의 구조 차이가 있지는 않을 거다. 다만 가족, 친구, 이웃 등의 친밀하고 구체적인 대상에서 출발하는 타인에 대한 연대감과 더 큰 인류라는 추상적 개념에서 출발하는 인류애 사이에 모종의 긴장 관계가 있는데, 후자를 경험할 기회가 적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전자를 인식하는 뇌의 활동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뿐.

그래서 아이들에게, 곤란에 처한 친구에게 느끼는 애틋한 마음을,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 똑같이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을 돕게 만들 게 아니라, 나의 사소한 행위 하나 하나가 거미줄처럼 얽히고 섥힌 이 거대한 세상에 끼치는 영향이 있다는 걸 늘 머리로 유념하게 가르치는 게 현명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00달러를 8:2로 나누는 대신 6:4로 나누면, 내 가족, 내 친구에게 돌아가는 몫은 줄지만, 그게 인간이 만들었음에도 인간에게조차 익숙하지 않은 이 거대한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생존방법이라는 걸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것보다는, 그냥 머리에 넣어버리 게 빠를지도...

일전에 Fredrich Hayek의 <Fatal Conceit: The Errors of Socialism>의 일부를 소개한 적 있는데, 이런 최근에 밝혀진 인간의 행동 양식에 대한 지식 없이도 이를 꿰뚫어본 Hayek의 통찰력은 새삼 감탄스럽다.
Part of our present difficulty is that we must constantly adjust our lives, our thoughts and our emotions, in order to live simultaneously within different kinds of orders according to different rules. If we were to apply the unmodified, uncurbed, rules of the micro-cosmos (i.e., of the small band or troop, or of, say, our families) to the macro-cosmos (our wider civilisation), as our instincts and sentimental yearnings often make us wish to do, we would destroy it. Yet if we were always to apply the rules of the extended order to our more intimate groupings, we would crush them. So we must learn to live in two sorts of world at once.

- <The Fatal Conceit: The Errors of Socialism> 중에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쉽지 않은 과제 중 하나는, 서로 다른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두개의 집단사이에서 동시에 존재하기 위해, 우리의 삶과 생각, 감정을 끊임없이 조절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의 본능과 감상에 젖어, (가족과 같은) 소규모 집단에서 작동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규칙들을 (사회 전체와 같은) 대규모 집단에 적용하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를 파괴해버리고 말 거다. 반면에 우리가 대규모 집단의 규칙들을 보다 친밀한 관계들에 적용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그 관계들을 모두 훼손시켜버리고 말 거다. 따라서 우리는 두가지 서로 다른 세상에서 동시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치명적 자만: 사회주의의 오류> 중에서

@ Hayek 얘기가 나왔으니 본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보너스 하나.

원출처: http://www.econstorie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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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면

일상다반사 2010/02/18 17:14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한달이 넘게 글을 안 썼네. -_-a 동면에서 깨어나야겠구나, 크허.

일단, 이몸은 여전히 일본에 있습니다. 2월 1일 귀국했다가 10일에 재출국, 4월 10일까지 이곳에 머물 계획. 동면에서 깨어난 기념 포스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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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 어쨌냐고? 가격이 무려... 1센트다. 정말이지 풍요의 시대는 풍요의 시대인가보다.

− How can you sell your product at such a low price?
= We lose a little bit on each sale, but we make it up on volume.

@ 물론 배송비가 거의 $3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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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동면
선물 이야기를 한 김에 조금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 하나. Waldfogel 교수는 선물이 지니는 경제적 의도(?)를 부의 재분배, 가부장주의, 또는 이타주의로 분류하고 있다. 내가 봤을 때 이 세가지가 완전히 대등한 관계는 아니지만 어쨌든 세가지가 뭔지 분리해서 생각해보자.

뭐, 부의 재분배란 말 그대로 무대가성 선물을 함으로써 경제적 가치를 가진 재화가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재분배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많이 가진 사람의 것을 뺏어서(?) 적게 가진 사람에게 나눠주는 로빈 훗식 재분배를 생각하는데, 자발적 선물을 통한 재분배는 이와는 약간 다를 수 있다.

이타주의란 순수하게 뭔가를 주고 싶은 마음에 선물을 받는 사람이 가장 좋아할만한 것을 골라서 선물을 주는 걸 말하고, 가부장주의란 선물을 주는 사람이 선물을 받는 사람의 생활습관이나 취향 등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의도가 섞여 있는 걸 말한다. 전자는 선물 받는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 CD를 선물하는 일이 이에 해당할 거고, 후자는 선물 하는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 CD를 선물하는 일 정도가 될 거다. 물론 이런 수준의 가부장주의는 그 의도가 올바르든 조금 빗나갔든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부장주의의 영향은 꽤 클 수 있다.

정부가 집행하는 모든 공공정책은 공리주의적이거나 가부장주의적 요소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보자. 국가에서 공교육 강화를 위해 1) 세금을 걷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2) 세금을 걷어서, 학교를 새로 짓거나 오래된 학교 시설을 정비하고, 교사들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사들 월급을 올리는 등의 다양한 정책적 시도를시행하는 걸 고려하고 있다고 하자.

가상의 세계 A

"그래, 학원비 때문에 등골 휘겠어. 제발 교육제도 좀 정상화해봐!"라며 국민들 대다수가 정부의 정책을 찬성한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국민이 찬성하는 정책 따위란 불가능한 거 아님? 되도 않은 일에 세금을 걷어서 쓴다며 일부 볼멘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정부는 이때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다, 어쩌겠냐, 몇명 안 되는 니들이 참아야지"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게 공리주의(utilitarianism).

가상의 세계 B

"세금 내라고? 시바, 세금 걷어서 나라에서 하는 일이 뭔데?" 어라, 이거 뭔가 익숙하잖아, 가상의 세계 맞아? ㅡㅠㅡ 아무튼 이 세계에서 어차피 필요한 건 다 학원에서 배우는 세상, 세금보다는 학원비가 훨씬 유용하다고! 그래서 국민 대다수가 1)번을 지지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공교육이 좆같았다고 앞으로도 그럴 리는 없쥐. 이번엔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있어!라며 세금을 걷어들이는 걸 강행할 때에 정부의 입장은"니들이 아직 뭘 몰라서 불만인가본데, 조금만 참아봐라. 내 참뜻을 알아들을 날이 올 거다"라는 거다. 이게 가부장주의(paternalism)다. 현정부의 대운하나, 미국산 쇠고기 파동 따위가 아주 좋은 예. 국민들이 찬성하는 정책을 본지 오래라 공리주의에 해당하는 예는 잘 생각이 안 나네. -_-a

물론 공리주의와 가부장주의가 완전히 갈리는 건 아니고, 사실 정부에서 시행하는 대부분의 정책의 순효과와 역효과가 게 칼로 잘리듯 갈리는 게 아닌지라, 찬반 세력이 항상 흙탕물 튀기며 싸우게 마련이고, 대부분의 정책 시행의 배후에는 두가지 원칙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공리주의에 입각했을 때에도 '다수의 소수에 대한 폭력' 같은 말들로 표현되는 역효과가 나타나긴 하지만, 수만명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 결정에서 공리주의적 접근은 꽤나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공리주의와 관련한 약점은 '공공 혹은 다수의 이익'를 가려내는 효과적인 메카니즘이 존재하는가에 있겠다.

그럼 가부장주의는 어떨까? 일단 가부장주의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설명하고 시작하자. 아이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야채도 먹어라"며 아이들이 먹기 싫어하는 걸 억지로 먹이려는 부모의 노력 따위가 가부장주의에 해당하는데, 이런 부모들의 노력을 특별히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는 많은 경우에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다양한 영양분이 균형 잡힌 식사를 하는 게 중요하다 따위--을 알고 있다는 점과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이 잘 되길 바라는 진심어린 마음이 있다는 두가지가 동시에 성립하기 때문에 설득력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정부나 기타 체계화된 조직이 개인에게 가부장적 압력(?)을 가할 때에 이 두가지를 동시에 성립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이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그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또 다른 예로 부모가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술, 담배를 못하게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술, 담배가--여전히 신체가 성장중인 아이들에게는 특히--몸에 나쁘다는 사실 혹은 정보 자체는 아이들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술, 담배를 즐길 권한을 박탈하는 것이 특별히 아이들의 자유권 침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술,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과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런 선택을 내렸을 때 그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건강을 해치는 것뿐만 아니라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다거나 싸운다는 등의 다양한 상황--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개인에게 있다는 사실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완전히 이해하는 시점이 언제라는 건 쉽게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통상적으로는 꽤나 임의적으로 20세 전후의 기준을 잡는다.

자, 그런데 정부에서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는 완전한 금주령을 내린다면? 이는 많은 경우에 자유권 침해로 해석된다. 그 이유인즉슨, 20세 전후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부모는 알고 있다는 통념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정부, 보다 정확히는 누군가의 부모일 정부의 구성원들이 알고 있다는 것 역시 일반적인 통념으로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 중 정부가 알고 있는 것 따위는 전혀 없다는 게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 때문에 나에게 어떤 제재를 가하기를 원한다면, 그게 뭔지 나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새로운 정보가 참이라는 가정 하에서 정부가 그 제재를 가하는 이유가 특정 이익집단의 편익을 보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포함 혹은 나를 제외한 다수의 이익(여기서 공리주의가 다시 작동한다)을 보호하기 위함이란 걸 설명할 의무가 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파동이 이에 실패한 아주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한가?--을 알고 있다는 것과 정부가 공공의 이익--쇠고기 수입이 과연 대중에게 값싼 쇠고기를 제공하기 위함인가?--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두가지를 모두 국민들에게 전달해야 함에도, 두가지에 모두 실패한 덕분에 꽤나 드라마틱한 몇달을 경험할 수 있었다. ㅡㅠㅡ

오늘날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경제철학의 이상적 핵심은 바로 경제적 가부장주의의 해체다. 정부가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는 방법은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임으로써 가능한데, 세금은 본질적으로 가부장적 요소가 있다. 그 이유인즉슨, 정부가 세금을 거둬 예산을 집행하는 과정 자체가, 나를 포함한 국민들을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나를 대신해서 내 돈을 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그럴 듯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갑은 돈을 모아 차를 사고 싶은데, 정부는 갑이 차 살 돈을 걷어가서는 4대강을 정비하겠다고 한다. 을은 새 카메라를 사고 싶었는데, (서울시) 정부는 그 돈을 걷어가서 청계천을 복원했다. 아, 어이없다. 소위 경제적 가부장주의의 해체를 지향하는 정부가 해체해버린 것은 고작해야 종부세. orz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세계 모든 좌파의 딜레마는 아마 여기 있을 거다. 개인의 자유와 정부의 공공복지 사업 투자 확대를 동시에 주장하는 좌파는 정부의 사회적 가부장주의는 해체하되 정부의 경제적 가부장주의는 옹호해야 하는 숙제를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그런데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사람들이 '세금'이란 단어는 이미 더럽힐대로 더럽혀 놨다. 직장 다니며 돈 버는 동안 세금은 열심히 냈는데, 경기가 나빠 실직했더니, 4대강 정비한다는 이야기는 계속 들리는데, 나 실업 수당 준다는 얘긴 없다. 많이는 못 벌어도 열심히 벌어서 세금 낼 건 냈는데, 이 동네 재개발한다고 노점상 철거하란다. 안 하고 버텼더니, 정부에서 내가 낸 세금 받는 경찰들이 들어와서 다 철거해버렸다.

더럽혀질대로 더럽혀진 '세금'이란 이름의 돈에서 사람들이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일에 올해 대한민국의 좌파가 성공했으면 좋겠다. 신발이 당장 다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내가 새 신발을 사는 것보다는, 출퇴근길에 이용하는 너덜너덜해진 도로를 정비하는 게 더 중요할 수 있고,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있는 책을 사서 읽는 것보다는, 선생님이 부족해서 배우지 못하는 시골 아이들에게 새로운 선생님을 보내주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배도 별로 안 고픈데 입이 심심해서 야식 먹고는 다시 살 빼야 된다고 헬쓰장 다니는 것보다, 실직자들에게 직업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게 중요할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정부는 태생적으로 가부장적 존재다. 대통령직, 국회, 경찰, 군대조차 민영화할 게 아니라면, 그 태생적 한계는 어쩔 수 없다. 결연히 외쳐라, 까짓거. I am your father. 결국 누구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누구를 설득할 것이냐의 문제다. 새해 벽두에 눈길에 막혀 각료 회의 제시간에 못하는 동안 MB가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봤길 희망한다.

"나는 올봄에 나온다는 애플 타블렛이 갖고 싶은데, 정부는 실업수당을 확대하겠다고 한다" 올해엔 이런 가슴 아픈 소식을 블로그 방문자들과 나누고 싶다.

@ 현정부에 대해서는 포기했다고? 포기하는 순간이 시합종료다. ㅡ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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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MB가 '취업 안 되는 젊은이들 기술 교육 시키자'는 발언을 했는데, 이에 대한 이택광님의 반응은 조금 과민반응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이 발언과 이 해석이 실험이 좀 딜딜 말리는 타이밍에 나와버리니 꽤나 의미심장하다. 내가 하는 일이란 게, 정말 딱 인문학만큼 경제적 가치 창출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는데, 비용은 그에 비해 천문학적으로 많이 드니 사실 경제적으로 쓸모없기로 말하자면 내가 인문학자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다.

사실 어디가서 물리학한다고 나에 대해 소개하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떤 걸 연구하냐?'는 질문에 가차없이 따라 오는 게 '그래서 그걸 어디에 쓰냐?'는 질문이다. 그럴 때면 정말 과학과 기술이 동치인 시대를 살고 있구나란 실감이 난다. 나는 물론 꽤나 자랑스럽게 '써먹을 데 없다'고 대답하지만, 대부분 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거나, 대답하기 귀찮아한다고 생각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어딘가엔 사용할 수 있으니 연구할 거 아녜요'라며 집요하게 캐묻는다.

물론 이에 대한 모범답안이 몇가지 있긴 하다. '지금은 뭐에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아직 모르는 걸 더 많이 알고 있는 후세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기술일 수 있다'거나 '그저 인간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순수한 호기심의 발로다' 따위가 그거다. 이런 수사들을 누가 언제 처음으로 읊조렸는지는 알 수 없다만, 그 최초의 누군가는 그 당시에 이런 수사들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었거나, 나름 섹시해 보였을 수도... 그렇지만 요샌 사실 좀 진부하다. 가끔은 나조차 믿지 않으면서도, 더 좋은 답이 없어서 아무생각 없이 내뱉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더 나은 답이 없다는 거, 그보다는 더 나은 답이 없을까 별로 고민해보지 않는다는 거,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사실 교육기관과 학문의 발전 과정을 보면, 근대 과학의 시초가 된 대부분의 아이디어들은 근대 이전의 봉건제시절에 탄생했는데, 당시 교육의 기회라는 건 대부분 노동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지배계급에게 한정돼 있었다.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이 분명한 봉건제도 하에서 노동계급은 노동하는 동안 지배계급은 남는 시간 동안 만물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거나,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것을 노동계급에게 정당화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과학이든 철학이든, 혹은 예술이든 '나한텐 재미있으니까'라는 순수한 관심 이외의 그 어떤 목적을 갖지 않아도 됐다.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단 하나의 잣대로 세상사를 가늠하는 천민자본주의가 인문학이나 순수 과학, 혹은 인간성을 죽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사실 이들을 죽이는 건 자본에 힘을 실어준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개념 위에서 출발한 민주주의일 거다. 무슨 이야기냐면 '만인이 평등하다'는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과학과 인문학의 당위성은 봉건제 하에서의 그것과 완전히 달라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만인이 평등하다면 특정 집단의 노동의 결과를 다른 집단이 정당한 댓가없이 취할 수 없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노동하는 동안, 나는 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에 일년 365일을 다 사용하느라 노동을 하지 않았/못했다면, 누가 잘못한 걸까?

물론 오늘날 소위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지식의 생산은 노동이다. 대부분의 과학자, 인문학자, 예술가에게 물어도 자신이 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다. 농부가 1년 내내 땅을 일궈 쌀을 생산하듯, 책, 실험기구, 악기 등과 매일 씨름하며 인간의 지식의 지평을 넓히고 새로운 예술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고 할 거다. 그렇지만 문제는 "누구를 위해서?"인가 이다.

이건 자본주의가 지식과 진리, 문화를 상품화하거나 돈거래로 만드는 것과는 관계 없는 문제다. 내가 A만 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서 B를 생산하여 '먹고 살기'위해서는, 누군가는 내게 B의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즉, 나는 A의 결과물 B를 누군가에게는 자본 혹은 B가 아닌 다른 어떤 재화와의 교환 가치가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야 가능한 거다. 여기서 B가 무엇이냐, 그리고 댓가를 지불하는 그 누군가가 누구냐는 전혀 상관없다. 지식/문화 생산을 취미활동이 아닌 직업으로 만드는 순간, 지식/문화의 상품화는 일어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그 가격을 누가 어떻게 매기느냐의 차이일 뿐...

이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이 평등하긴 한데, 누군가의 노동의 결과는 당연히 상품화되는 거고, 누군가의 노동의 결과는 상품화하기에는 너무나 고귀하다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실제 문제는 지식의 상품화가 아니라, 지식의 가치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에서 시장이 지식의 교환 가치를 너무 싸게 매겨 버린 거다. 그런 현실에서 이공계/인문학 기피와 맞물린 한/치/의/법/경영대로의 급속한 인력 이탈 현상은 놀랄 일이 아니다. 

과학하는 사람들이 '과학은 중요하다', 인문학하는 사람들이 '인문학은 중요하다'고 믿는 건 당연하다. 과학이 혹은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과학을 하고 인문학을 하고 있는 거잖은가? 그런데 시장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결국 정부의 역할은 때로는 시장의 횡포 때로는 시장의 삽질을 바로 잡는 건데, 어라, 정부는 꼼짝도 않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게 빠졌는데, 정부가 이 중개자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정부는 시장과는 다른 가치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의 철학과 정책, 매스미디어의 포지셔닝 등이 모두 나름의 역할이 있는 건 맞다. 그렇지만 이런 가치 판단의 기준은 어디선가 저절로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흥미로워하는 것을 남들이 흥미로워하지 않을 때, 그게 흥미로운 일이란 걸 납득시킬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다. 그럼에도 정작 학계에서 과학을, 인문학을 살리라고 하면서 정작 뱉어내는 수사들은 '음식이 육체를 살찌운다면, 문화는 정신을 살찌운다', '돈이 행복을 살 수는 없다' 따위 뿐이라면--이런 주장들이 왜 참인지를 효과적으로 납득시킬 능력이 없다면--딱,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거다'라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만큼의 설득력을 가질 뿐이다.

노동계급이 사회 대부분의 부를 생산함에도, 정작 그 부의 대부분을 누리는 게 소수의 지배계급인 사회 구조에서, 지배계급이 지식과 문화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동시에 이를 누리는 건 당연하다. 오늘날의 과학자, 인문학자, 예술가들이 그 당시의 지배계급이 향유했던 그 특권을 부러워하는 것 역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에 대한 낭만에 사로잡혀 자본주의와 정부의 어리석음을 향해 손가락질한다면, 이는 집단 이기주의에 기반하여 내게도 그 당시 그들이 누렸던 '특권'을 달라는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쌀 농사꾼이 고객을 상대로 빵 대신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하듯, 우리는 핸드백 하나를 사는 것보다 책 10권을 읽는 게 더 좋은 이유, 혹은 아이폰 같은 신제품 하나 더 개발하는 것보다 초유체의 신비를 규명하는 게 더 좋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단순히 '책 10권 안에는 새 핸드백 하나로는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라면 '나는 새 핸드백 하나 사는 게 책 10권 읽는 것보다 좋던데?'라고 되돌아오는 한마디만큼이나 허탈하잖은가.

내가 생산하는 지식과 문화를 단순히 돈으로 교환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 진정한 가치에 대해 세상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한 자본주의가 세상을 망친 게 아니라, 내가 생산하는 지식/문화는 천박한 자본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고귀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이 멀어서,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지식인들이 자기 무덤만 파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거다. 원래가--인류의 지식/문화는 돈으로 매길 수 없다는 믿음처럼--나한테는 너무도 당연한 게, 남들한테는 완전 딴 세상 이야기이게 마련이다.

@ 언제나처럼 답은 없이 문제제기만...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난 내가 하는 일에 왜 국민의 혈세를 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포기한지 오래. 그냥 나는 이거 하고 싶은데, 국가가 (국민들을 대표해서) 이 일에 돈 들이겠다면 땡큐고, 싫다면 그게 정상이지 싶음... -_-a 진리를 밝혀내기 위한 인간의 무한한 호기심이란 따지고 보면 무한한 호기심이 있는 인간들도 더러는 있다는 얘길 아전인수식으로 비틀어 버린 것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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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전에 스크랩해놓고는 까먹고 있다가 이제서야... 간만에 일본과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
Another contrast is between people who type in "is it wrong to" vs. people who type in "is it unethical to."  If you type in "is it wrong to" the first suggestion is "is it wrong to sleep with your cousin." Number two is (yes, I tested it in Google): "Is it wrong to sleep with your step dad after your mom dies."  If you type in "is it unethical to," the first suggestion is "is it ethical to sell customer information."
- Tyler Cowen의 블로그 포스트, The best sentence I read today, 7:46 a.m. edition 中에서

@ 우리말로도 테스트 해볼래도 도저히 안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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