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다음의 시나리오들을 각각 생각해보자.
각각의 경우 여러분의 대답은?
다양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번의 경우 아이를 죽인다와 죽이지 않는다가 반반 정도라고 하는데, 실제로 아이가 있는 사람들만 대상으로 할 경우 죽이지 않는다가 더 많다고 한다. 2번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레버는 당기겠지만, 사람을 철로에 밀어넣지는 않겠다고 하며, 3번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비싼 옷을 버리게 되더라도 강물에는 서슴없이 뛰어들겠다고 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호주머니를 선뜻 열겠다는 사람의 수는 그보다 현격하게 작다고 한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당연한 거 아냐? 뭐, 그렇게 놀라운 결과는 아닌데, 그렇다고 논리적으로 쉽게 설명되는 결과도 아니다. 일단 2번에서 주어진 두가지 상황에서 논리적으로는 둘다 예라고 하던가 둘다 아니오라고 하는 게 일관성 있는 대답이다. 그리고 2번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1번에서 또한 아이를 죽일 수 있어야 일관성 있는 태도다. 물론 이쯤에서 '원래 이 세상은 논리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지 않는다고'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좀 너무 편리하잖아.
온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려면 아직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과학 기술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할 수 있다. 1번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져놓고, 그 사람들 뇌의 사진을 찍어보면, 아이를 죽이겠다고 대답하는 사람들과 아이를 죽일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 실제로 주로 이용하는 뇌의 부위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 더 신기한 건, 3번 질문에서,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겠다고 대답할 때와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를 위해 성금을 하겠다고 대답할 때, 두 경우 모두 피상적으로는, 내가 모르는 아이를 위해 약간의 경제적 희생을 각오한다는 동일한 논리구조를 따른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결정을 내리는 뇌의 부위는 다르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물론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인간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이에 맞춰 인간의 뇌 또한 진화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힘을 얻고 있다. 무슨 말이냐면, 인간이 동굴에 살면서 사냥과 수렵을 하던 시절의 개체 혹은 종족의 생존 개념과 오늘날 개체 또는 종족의 생존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는 거다. 수천, 수만년전의 인간에게 인류, 지구 반대편, 대의 따위의 개념은 없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건져주면 되고, 맹수를 발견하면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무리지어 사냥을 했으면, 고기를 나눠 먹으면 됐고, 그걸 뺏어가려는 외부인이 있으면 힘을 합쳐 물리쳤다. 내 생존의 아군과도, 적군과도 언제나 눈을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눈빛을 교환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류란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만나는 사람들 전부일 뿐이고, 인류의 생존을 위해 내가 해야 하는 행위의 경계는 분명했다. 나의 유전자를 품고 있는 아이의 눈빛을 보고도 그 아이의 숨통을 끊을 수는 없는 일이고, 무기력하게 물살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사람의 눈빛을 보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본능의 문제이지 논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의를 위해 내 아이를 죽이고, 인류의 기아 문제를 위해 내 지갑을 여는 일 따위는 오늘날의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얼핏보면 똑같아 보이는 문제를 놓고도, 무의식은 이 문제들 사이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해결할 문제와 추상적 사고로 해결할 문제라는 경계를 긋는다. 레버를 당기는 건 5사람의 목숨과 1사람의 목숨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추상적 문제지만, 사람을 철로로 미는 건 내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을 살인해야 하는 본능적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뇌가 각 부위별로 그 기능이 나뉘어서, 각 부위가 결투를 벌이는 거면, 더 어찌해볼 수 없는 거 아니냐고? 물론 이미 어떤 사람의 뇌의 각 기능이 충분히 발달했다면, 그 사람의 행동 양식을 바꾸기는 쉽지 않겠지만, 아직도 희망은 있다.
다음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갑에게 을과 나눠 가지라며 100달러를 주는데, 이때 조건이 한가지 있다. 100달러를 갑과 을 사이에 몇 대 몇으로 나눌지는 1달러 단위로 갑이 결정하되, 을이 이 비율에 수긍하면 그 비율에 따라 두 사람이 돈을 나눠가지면 되고, 을이 이 비율을 거부하면 돈을 내가 도로 회수해간다는 조건이다. 이 경우 단순 논리만 따지면, 갑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갑=99 : 을=1의 비율을 제시하고,을 역시 갑이 우선권을 쥔 상황하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방법을 모색하려 한다면 1달러 > 빵달러니까, 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게 합리적이다. 그렇지만, 갑이 실제로 이런 조건을 제시하면 을은 열에 아홉 거부해버리고 만다. 흔히 말하는 괘씸죄가 성립했다고 볼 수 있겠다.
재미있는 건, 이 실험(?)을 해보면, 더 파편화되고,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되는 소위 선진국 사람들은 5:5 내지는 6:4 정도의 비율로 돈을 성공적(?)으로 나눠 갖는데 반해, 여전히 주변 사람들과의 유대가 중시되는 개도국이나 후진국 사람들은 오히려 8:2, 9:1 같은 편파적(?)인 비율로 돈을 나누려고 하다가 괘씸죄에 걸려 거부당하는 경우가 더 잦다고 한다.
이는 선진국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사랑이 더 넘치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이 기계화된 사회의 부품으로 전락함으로써, 인간미가 파괴되고 있다고 소리 높이고 있느냔 말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웃과 눈빛조차 안 마주치는 파편화된 사회가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이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 넓은 인류를 향해 확대하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나도 예전엔 그랬다 -_-a) 이게 그렇게 단순히 가족, 친구, 동향사람, 동포 등으로 그어진 임의의 경계선을 한없이 넓힘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변화된--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이 거대해진--사회 구조가 요구하는 변화된 삶의 규칙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규칙을 체화하는데 있다. 현생 인류 사이에서 진화적으로 뇌의 구조 차이가 있지는 않을 거다. 다만 가족, 친구, 이웃 등의 친밀하고 구체적인 대상에서 출발하는 타인에 대한 연대감과 더 큰 인류라는 추상적 개념에서 출발하는 인류애 사이에 모종의 긴장 관계가 있는데, 후자를 경험할 기회가 적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전자를 인식하는 뇌의 활동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뿐.
그래서 아이들에게, 곤란에 처한 친구에게 느끼는 애틋한 마음을,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 똑같이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을 돕게 만들 게 아니라, 나의 사소한 행위 하나 하나가 거미줄처럼 얽히고 섥힌 이 거대한 세상에 끼치는 영향이 있다는 걸 늘 머리로 유념하게 가르치는 게 현명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00달러를 8:2로 나누는 대신 6:4로 나누면, 내 가족, 내 친구에게 돌아가는 몫은 줄지만, 그게 인간이 만들었음에도 인간에게조차 익숙하지 않은 이 거대한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생존방법이라는 걸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것보다는, 그냥 머리에 넣어버리 게 빠를지도...
일전에 Fredrich Hayek의 <Fatal Conceit: The Errors of Socialism>의 일부를 소개한 적 있는데, 이런 최근에 밝혀진 인간의 행동 양식에 대한 지식 없이도 이를 꿰뚫어본 Hayek의 통찰력은 새삼 감탄스럽다.
@ Hayek 얘기가 나왔으니 본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보너스 하나.
원출처: http://www.econstories.tv
- 시대는 나치 독일. 유대인인 당신은 독일군의 눈을 피해 한 가정집 지하에 다른 유대인들과 숨어있는 가운데 독일군이 집에 들어와 수색을 시작했다. 아직 젖도 못 뗀 당신의 아기를 안고 있는데, 아기를 보니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
정황상 아이의 숨을 틀어막아 아이를 죽이거나, 독일군에게 발각돼 모두 죽거나 둘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의 아이를 죽일
수 있겠는가? 설령 당신의 손으로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옆사람이 아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면, 그 사람이 죽이게끔 아이를 넘겨줄
수 있겠는가?
- 고장난 열차 안에 5명의 사람이 갖혀 있는데, 이 열차가 철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문제는 완공되지 않은 철로의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다. 당신 앞에 레버가 하나 있는데,
이 레버를 당기면 열차가 다른 철로로 옮겨가서 무사히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문제는 이 다른 철로에는 현재 뭔가 작업을 하고
있는 귀머거리 인부가 한명 있다. 레버를 당기지 않을 경우 열차 안의 5명이 죽게 생겼고, 레버를 당긴다면 철로에서 작업하는
인부 한명이 죽게 생겼다. 당신은 레버를 당기겠는가?
이번에는 조금 비슷하지만 또 조금 다른 문제를 생각해보자. 역시나 5명의 사람이 갖혀 있는 고장난 열차가 낭떠러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 당신은 아주 거구의 사나이와 함께 그 철로 옆에 서 있다. 당신이 그 사나이를 철로로 밀어버리면 열차와 사나이의 충돌로 열차를 멈출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사나이를 밀겠는가? - 당신이 엄청나게 비싼 옷을 입고 강가를 거닐고 있는데, 강물에 어린 아이가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다. 강물에 뛰어들어 어린 아이를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 아이를 구해주고는 집에 와서 우편물을 확인해보니, 당신이 입고 있던 양복값의 10분의 1만 기부를 하면 지구 반대편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에게 1년치 식량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은 기부를 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각각의 경우 여러분의 대답은?
다양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번의 경우 아이를 죽인다와 죽이지 않는다가 반반 정도라고 하는데, 실제로 아이가 있는 사람들만 대상으로 할 경우 죽이지 않는다가 더 많다고 한다. 2번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레버는 당기겠지만, 사람을 철로에 밀어넣지는 않겠다고 하며, 3번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비싼 옷을 버리게 되더라도 강물에는 서슴없이 뛰어들겠다고 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호주머니를 선뜻 열겠다는 사람의 수는 그보다 현격하게 작다고 한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당연한 거 아냐? 뭐, 그렇게 놀라운 결과는 아닌데, 그렇다고 논리적으로 쉽게 설명되는 결과도 아니다. 일단 2번에서 주어진 두가지 상황에서 논리적으로는 둘다 예라고 하던가 둘다 아니오라고 하는 게 일관성 있는 대답이다. 그리고 2번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1번에서 또한 아이를 죽일 수 있어야 일관성 있는 태도다. 물론 이쯤에서 '원래 이 세상은 논리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지 않는다고'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좀 너무 편리하잖아.
온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려면 아직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과학 기술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할 수 있다. 1번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져놓고, 그 사람들 뇌의 사진을 찍어보면, 아이를 죽이겠다고 대답하는 사람들과 아이를 죽일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 실제로 주로 이용하는 뇌의 부위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 더 신기한 건, 3번 질문에서,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겠다고 대답할 때와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를 위해 성금을 하겠다고 대답할 때, 두 경우 모두 피상적으로는, 내가 모르는 아이를 위해 약간의 경제적 희생을 각오한다는 동일한 논리구조를 따른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결정을 내리는 뇌의 부위는 다르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물론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인간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이에 맞춰 인간의 뇌 또한 진화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힘을 얻고 있다. 무슨 말이냐면, 인간이 동굴에 살면서 사냥과 수렵을 하던 시절의 개체 혹은 종족의 생존 개념과 오늘날 개체 또는 종족의 생존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는 거다. 수천, 수만년전의 인간에게 인류, 지구 반대편, 대의 따위의 개념은 없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건져주면 되고, 맹수를 발견하면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무리지어 사냥을 했으면, 고기를 나눠 먹으면 됐고, 그걸 뺏어가려는 외부인이 있으면 힘을 합쳐 물리쳤다. 내 생존의 아군과도, 적군과도 언제나 눈을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눈빛을 교환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류란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만나는 사람들 전부일 뿐이고, 인류의 생존을 위해 내가 해야 하는 행위의 경계는 분명했다. 나의 유전자를 품고 있는 아이의 눈빛을 보고도 그 아이의 숨통을 끊을 수는 없는 일이고, 무기력하게 물살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사람의 눈빛을 보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본능의 문제이지 논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의를 위해 내 아이를 죽이고, 인류의 기아 문제를 위해 내 지갑을 여는 일 따위는 오늘날의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얼핏보면 똑같아 보이는 문제를 놓고도, 무의식은 이 문제들 사이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해결할 문제와 추상적 사고로 해결할 문제라는 경계를 긋는다. 레버를 당기는 건 5사람의 목숨과 1사람의 목숨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추상적 문제지만, 사람을 철로로 미는 건 내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을 살인해야 하는 본능적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뇌가 각 부위별로 그 기능이 나뉘어서, 각 부위가 결투를 벌이는 거면, 더 어찌해볼 수 없는 거 아니냐고? 물론 이미 어떤 사람의 뇌의 각 기능이 충분히 발달했다면, 그 사람의 행동 양식을 바꾸기는 쉽지 않겠지만, 아직도 희망은 있다.
다음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갑에게 을과 나눠 가지라며 100달러를 주는데, 이때 조건이 한가지 있다. 100달러를 갑과 을 사이에 몇 대 몇으로 나눌지는 1달러 단위로 갑이 결정하되, 을이 이 비율에 수긍하면 그 비율에 따라 두 사람이 돈을 나눠가지면 되고, 을이 이 비율을 거부하면 돈을 내가 도로 회수해간다는 조건이다. 이 경우 단순 논리만 따지면, 갑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갑=99 : 을=1의 비율을 제시하고,을 역시 갑이 우선권을 쥔 상황하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방법을 모색하려 한다면 1달러 > 빵달러니까, 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게 합리적이다. 그렇지만, 갑이 실제로 이런 조건을 제시하면 을은 열에 아홉 거부해버리고 만다. 흔히 말하는 괘씸죄가 성립했다고 볼 수 있겠다.
재미있는 건, 이 실험(?)을 해보면, 더 파편화되고,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되는 소위 선진국 사람들은 5:5 내지는 6:4 정도의 비율로 돈을 성공적(?)으로 나눠 갖는데 반해, 여전히 주변 사람들과의 유대가 중시되는 개도국이나 후진국 사람들은 오히려 8:2, 9:1 같은 편파적(?)인 비율로 돈을 나누려고 하다가 괘씸죄에 걸려 거부당하는 경우가 더 잦다고 한다.
이는 선진국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사랑이 더 넘치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이 기계화된 사회의 부품으로 전락함으로써, 인간미가 파괴되고 있다고 소리 높이고 있느냔 말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웃과 눈빛조차 안 마주치는 파편화된 사회가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이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 넓은 인류를 향해 확대하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나도 예전엔 그랬다 -_-a) 이게 그렇게 단순히 가족, 친구, 동향사람, 동포 등으로 그어진 임의의 경계선을 한없이 넓힘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변화된--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이 거대해진--사회 구조가 요구하는 변화된 삶의 규칙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규칙을 체화하는데 있다. 현생 인류 사이에서 진화적으로 뇌의 구조 차이가 있지는 않을 거다. 다만 가족, 친구, 이웃 등의 친밀하고 구체적인 대상에서 출발하는 타인에 대한 연대감과 더 큰 인류라는 추상적 개념에서 출발하는 인류애 사이에 모종의 긴장 관계가 있는데, 후자를 경험할 기회가 적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전자를 인식하는 뇌의 활동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뿐.
그래서 아이들에게, 곤란에 처한 친구에게 느끼는 애틋한 마음을,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 똑같이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을 돕게 만들 게 아니라, 나의 사소한 행위 하나 하나가 거미줄처럼 얽히고 섥힌 이 거대한 세상에 끼치는 영향이 있다는 걸 늘 머리로 유념하게 가르치는 게 현명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00달러를 8:2로 나누는 대신 6:4로 나누면, 내 가족, 내 친구에게 돌아가는 몫은 줄지만, 그게 인간이 만들었음에도 인간에게조차 익숙하지 않은 이 거대한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생존방법이라는 걸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것보다는, 그냥 머리에 넣어버리 게 빠를지도...
일전에 Fredrich Hayek의 <Fatal Conceit: The Errors of Socialism>의 일부를 소개한 적 있는데, 이런 최근에 밝혀진 인간의 행동 양식에 대한 지식 없이도 이를 꿰뚫어본 Hayek의 통찰력은 새삼 감탄스럽다.
Part of our present difficulty is that we must constantly adjust our lives, our thoughts and our emotions, in order to live simultaneously within different kinds of orders according to different rules. If we were to apply the unmodified, uncurbed, rules of the micro-cosmos (i.e., of the small band or troop, or of, say, our families) to the macro-cosmos (our wider civilisation), as our instincts and sentimental yearnings often make us wish to do, we would destroy it. Yet if we were always to apply the rules of the extended order to our more intimate groupings, we would crush them. So we must learn to live in two sorts of world at once.- <The Fatal Conceit: The Errors of Socialism> 중에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쉽지 않은 과제 중 하나는, 서로 다른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두개의 집단사이에서 동시에 존재하기 위해, 우리의 삶과 생각, 감정을 끊임없이 조절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의 본능과 감상에 젖어, (가족과 같은) 소규모 집단에서 작동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규칙들을 (사회 전체와 같은) 대규모 집단에 적용하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를 파괴해버리고 말 거다. 반면에 우리가 대규모 집단의 규칙들을 보다 친밀한 관계들에 적용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그 관계들을 모두 훼손시켜버리고 말 거다. 따라서 우리는 두가지 서로 다른 세상에서 동시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치명적 자만: 사회주의의 오류> 중에서
원출처: http://www.econstorie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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