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님의 글 <윤종신에게 돌 던지는 사람들>에서 트랙백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 중 하나는 자본주의가 자본가에게 권력을 쥐어준다는 거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본의 노예가 되어 인간성이 말살된다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맑스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이나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 사람을 비판한 적은 없다. 맑스가--이념으로써가 아니라 경제학으로써의--자본주의를 비판한 핵심은 모든 부가가치는 노동자의 생산성에 의해서만 발생할 뿐인데, 이중 일부를 자본가가 취함으로써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거였다.
다시 말해 자본가가 획득하는 모든 이윤은 착취의 결과고, 정당한 사회에서는 모든 부가가치는 노동의 댓가로 노동자들에게'만' 고르게 돌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의류 회사에 취직해서 티셔츠를 만들었다면, 티셔츠를 만들어 판 돈은 나와 내 동료 노동자들의 몫이지 회사 사장(이 티셔츠 생산에 직접 뛰어들지 않았다면)에게 돌아갈 몫은 없다는 거다. (물론 맑스의 이런 관점이 꼭 맞지는 않다. 이 주장의 오류와 관련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교하는 이야기는 어차피 다음에 한번 짚고 넘어갈 계획이 있으니, 여기서는 넘어가자.)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비판의 촛점이 불분명해지면서 개인의 이윤 추구는 기본적으로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됐다. 그리고 윤종신의 영계백숙 유료화에 대한 비난의 기저에 깔린 것 역시 이런 인식이다. 우리는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윤종신이, 그런 우리의 사랑과 관심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윤종신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의 노래를 팬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길 바란다. 인간적이란 건 그런 거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1년 동안 힘들여 농사를 지은 것들을 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을 돈벌레라고 비난하며, 내다 파는 대신에 결식 아동들에게 기부하라고 윽박지르지는 않는다. 우리는 야근과 회식에 쩌들어 사는 월급쟁이들을 보고 어떻게 월급 같은 걸 받을 수 있냐며, 사내 식당에서 식사--정말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해준다면 무료로 일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근로조건을 제공하는 회사가 있다면, 노동자를 착취하고 자기 배만 불리는 자본가라며 그 회사 사장이 다시 도마에 오를 거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어떤 노동의 댓가는 정당하다고 판단하며, 어떤 노동의 댓가는 불합리하다고 공격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Fredrich Hayek만큼 정확히 표현한 사람도 없으리라.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지도 신뢰하지도 않기 때문에 수시로 경제적 손익을 따지기도 하고, 댓가를 바라고 선행을 행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타인조차 무한히 사랑하고 신뢰하지만, 그가 나를 사랑하고 신뢰한다고 믿지 않는 역설에 빠져, 수없이 많은 계약서에 사인을 하며 살지 않는가? 반면에 우리는 형제들끼리도 계약관계를 지배해야할 손익계산을 하느라, 재산을 놓고 싸우는 일을 얼마나 많이 봐왔는가?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관계가 작동하는(이라기보다는 사실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손익을 초월한 무조건적 사랑, 댓가를 바라지 않는 베품 등--을 낭만화하며 세상 만사가 그에 따라서 작동하기를 바란다, 단, 내가 이 사랑의 수혜자일 때에만... 윤종신이 돈보다 우리를 사랑해서 노래를 무료로 나눠주길 원한다면, 우리는 돈보다 윤종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무료로 나눠주는 음악에도 기꺼이 돈을 내야 함에도, 그걸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음악인이 자신의 노래, 그 노래를 쓰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요구--여기서 윤종신의 요구가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길 원한다면, 그 주장은 '가격이 너무 비싸다'여야지 '돈을 받고 팔면 안 된다'일 수는 없다--하는 것조차 비인간적이 되어 버린 한국의 이땅에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생산자가 소비자를 착취하는 세상을 비판하고 비관했던 맑스가 무덤에서 노동자를 착취하는 소비자를 보면서 과연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 요새 자본주의랑 사회주의에 대해 너무 고민(?)을 많이 해서 모든 걸 이 관점에서 해석하게 된다. -_-a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 중 하나는 자본주의가 자본가에게 권력을 쥐어준다는 거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본의 노예가 되어 인간성이 말살된다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맑스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이나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 사람을 비판한 적은 없다. 맑스가--이념으로써가 아니라 경제학으로써의--자본주의를 비판한 핵심은 모든 부가가치는 노동자의 생산성에 의해서만 발생할 뿐인데, 이중 일부를 자본가가 취함으로써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거였다.
다시 말해 자본가가 획득하는 모든 이윤은 착취의 결과고, 정당한 사회에서는 모든 부가가치는 노동의 댓가로 노동자들에게'만' 고르게 돌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의류 회사에 취직해서 티셔츠를 만들었다면, 티셔츠를 만들어 판 돈은 나와 내 동료 노동자들의 몫이지 회사 사장(이 티셔츠 생산에 직접 뛰어들지 않았다면)에게 돌아갈 몫은 없다는 거다. (물론 맑스의 이런 관점이 꼭 맞지는 않다. 이 주장의 오류와 관련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교하는 이야기는 어차피 다음에 한번 짚고 넘어갈 계획이 있으니, 여기서는 넘어가자.)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비판의 촛점이 불분명해지면서 개인의 이윤 추구는 기본적으로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됐다. 그리고 윤종신의 영계백숙 유료화에 대한 비난의 기저에 깔린 것 역시 이런 인식이다. 우리는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윤종신이, 그런 우리의 사랑과 관심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윤종신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의 노래를 팬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길 바란다. 인간적이란 건 그런 거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1년 동안 힘들여 농사를 지은 것들을 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을 돈벌레라고 비난하며, 내다 파는 대신에 결식 아동들에게 기부하라고 윽박지르지는 않는다. 우리는 야근과 회식에 쩌들어 사는 월급쟁이들을 보고 어떻게 월급 같은 걸 받을 수 있냐며, 사내 식당에서 식사--정말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해준다면 무료로 일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근로조건을 제공하는 회사가 있다면, 노동자를 착취하고 자기 배만 불리는 자본가라며 그 회사 사장이 다시 도마에 오를 거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어떤 노동의 댓가는 정당하다고 판단하며, 어떤 노동의 댓가는 불합리하다고 공격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Fredrich Hayek만큼 정확히 표현한 사람도 없으리라.
Part of our present difficulty is that we must constantly adjust our lives, our thoughts and our emotions, in order to live simultaneously within different kinds of orders according to different rules. If we were to apply the unmodified, uncurbed, rules of the micro-cosmos (i.e., of the small band or troop, or of, say, our families) to the macro-cosmos (our wider civilisation), as our instincts and sentimental yearnings often make us wish to do, we would destroy it. Yet if we were always to apply the rules of the extended order to our more intimate groupings, we would crush them. So we must learn to live in two sorts of world at once.- <The Fatal Conceit: The Errors of Socialism> 중에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쉽지 않은 과제 중 하나는, 서로 다른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두개의 집단사이에서 동시에 존재하기 위해, 우리의 삶과 생각, 감정을 끊임없이 조절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의 본능과 감상에 젖어, (가족과 같은) 소규모 집단에서 작동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규칙들을 (사회 전체와 같은) 대규모 집단에 적용하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를 파괴해버리고 말 거다. 반면에 우리가 대규모 집단의 규칙들을 보다 친밀한 관계들에 적용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그 관계들을 모두 훼손시켜버리고 말 거다. 따라서 우리는 두가지 서로 다른 세상에서 동시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치명적 자만: 사회주의의 오류> 중에서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지도 신뢰하지도 않기 때문에 수시로 경제적 손익을 따지기도 하고, 댓가를 바라고 선행을 행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타인조차 무한히 사랑하고 신뢰하지만, 그가 나를 사랑하고 신뢰한다고 믿지 않는 역설에 빠져, 수없이 많은 계약서에 사인을 하며 살지 않는가? 반면에 우리는 형제들끼리도 계약관계를 지배해야할 손익계산을 하느라, 재산을 놓고 싸우는 일을 얼마나 많이 봐왔는가?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관계가 작동하는(이라기보다는 사실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손익을 초월한 무조건적 사랑, 댓가를 바라지 않는 베품 등--을 낭만화하며 세상 만사가 그에 따라서 작동하기를 바란다, 단, 내가 이 사랑의 수혜자일 때에만... 윤종신이 돈보다 우리를 사랑해서 노래를 무료로 나눠주길 원한다면, 우리는 돈보다 윤종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무료로 나눠주는 음악에도 기꺼이 돈을 내야 함에도, 그걸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음악인이 자신의 노래, 그 노래를 쓰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요구--여기서 윤종신의 요구가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길 원한다면, 그 주장은 '가격이 너무 비싸다'여야지 '돈을 받고 팔면 안 된다'일 수는 없다--하는 것조차 비인간적이 되어 버린 한국의 이땅에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생산자가 소비자를 착취하는 세상을 비판하고 비관했던 맑스가 무덤에서 노동자를 착취하는 소비자를 보면서 과연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 요새 자본주의랑 사회주의에 대해 너무 고민(?)을 많이 해서 모든 걸 이 관점에서 해석하게 된다.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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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ㅋ
오오. 영계백숙! ㅠ0ㅠ 저는 무한도전 완전 팬~ 잘은 모르지만 프로그램에서 무료배포를 전재로 기획했기 때문에 말썽인거 아닌가요?
리믹스 버전에 대해서는 그런 얘기가 없었던거 아닌가? 그냥 무조건 줄줄이 엮는 거야?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