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시작은 철학이었지만, 근대-현대 과학은 철학과 전혀 다르다. 철학이 아직도 인식에 대한 사유에 떠돌고 있는데 반해, 근대 과학의 발전과 함께 과학은 현실이라는 대단히 도그마틱한 개념의 확신에 바탕을 두기 시작했다.
현실은 기대의 만족과 이의 되풀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환경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현실에 대한 기대값과 맞아떨어지며,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기 때문이란 거다. 내가 잠들기 전의 환경이 잠에서 깨어난 후의 환경과 다르지만, 잠들기 전의 '내일 아침엔 여기가 이런 모습일 거야'라고 기대할 수 있는 환경과 내가 깨어난 후에 직접 체험하고 있는 내 환경과의 괴리는 무시할 수 있는 정도다.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매일매일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그제와 어제가 비슷하고,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며, 내일도 오늘과 비슷할 거다.
누군가 초자연적 현상(사실 '초자연'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모순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만 딱히 대체할만한 단어가 없다)을 경험했을 때, 그 초자연적 현상을 현실로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본 사람의 1차적 반응은, '놀랍다'나 '신기하다'는 주어진 현상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이건 꿈일 거야' 또는 '이게 진짜일까?'라는 식으로 현상에 대한 인식의 부정을 통해 의식 내에 형성된 현실을 보호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사람의 현실 인식은 굉장히 도그마틱한 구석이 있어서, 어떤 현상에 대한 확률을 거의 항상 0이나 1로 수렴시켜버리고는, 1로 수렴하는 현상만을 선별하여 현실 세계로 구축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확률의 수렴 과정이 문제가 된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가끔 글자를 휙 지나가며 읽다 보면 잘못 읽는 경우가 있다. '검'이란 글자를 '감'으로 봤다던지 하는 그런 경우... 이럴 때 우리는 글자가 제멋대로 바뀌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재차 확인해보고 '검'으로 보이면 '검'을 '감'으로, '감'으로 보면 '감'을 '검'으로 잘못 봤다고 받아들인다.
기대의 만족이라는 것이 대부분 선행된 되풀이의 범위 내에서 쌓이는데, 모든 사람은 죽더라는 것과 죽은 사람은 살아나지 않더라, 한번 쓰여진 글자는 바뀌지 않더라 따위가 그에 해당된다. 재미있는 것은 일단 어떤 기대가 형성되면 그 기대에 위배되는 현상을 경험할 경우, 그 경험은 그동안 쌓아가던 되풀이의 데이터에 추가시키지 않음으로써 기대를 보존한다는 것이다. 한번 종이에 쓰여진 글자는 저절로 다른 글자로 바뀌지 않는다고 기대하게 되면, 글자가 바뀌는 경험을 아무리 많이 해도, 매번 '그냥 잘못 봤다'라고 인식하게 되지, 글자가 바뀐 경험의 데이터를 축적해가면서 '글자가 바뀔 수도 있다'는 기대를 쌓아올리지 않는다. 게다가 교육을 통한 기대의 세습 작용도 이에 일조한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는 경우는 없다고 알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사람이 죽었다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나타났던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모든 데이터들을 그 자리에서 제거해버림으로써, 보존된 데이터들로만 자기 모순이 없는 결론을 내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대부분 '비현실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현실에 대한 의심'보다는 '인식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는데, 어쩌면 현실이야말로 의심 받아야 할 제일의 대상일지 모른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현대 과학이 지닌 보이지 않는 위험이 놓여있다.
@ 이런 글을 쓰긴 쓴다만 사실 이런 글을 쓰고 나면 뭐, 딱히 과학에 대한 불신이 생긴다기 보다는 '철학은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_-,,
현실은 기대의 만족과 이의 되풀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환경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현실에 대한 기대값과 맞아떨어지며,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기 때문이란 거다. 내가 잠들기 전의 환경이 잠에서 깨어난 후의 환경과 다르지만, 잠들기 전의 '내일 아침엔 여기가 이런 모습일 거야'라고 기대할 수 있는 환경과 내가 깨어난 후에 직접 체험하고 있는 내 환경과의 괴리는 무시할 수 있는 정도다.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매일매일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그제와 어제가 비슷하고,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며, 내일도 오늘과 비슷할 거다.
누군가 초자연적 현상(사실 '초자연'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모순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만 딱히 대체할만한 단어가 없다)을 경험했을 때, 그 초자연적 현상을 현실로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본 사람의 1차적 반응은, '놀랍다'나 '신기하다'는 주어진 현상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이건 꿈일 거야' 또는 '이게 진짜일까?'라는 식으로 현상에 대한 인식의 부정을 통해 의식 내에 형성된 현실을 보호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사람의 현실 인식은 굉장히 도그마틱한 구석이 있어서, 어떤 현상에 대한 확률을 거의 항상 0이나 1로 수렴시켜버리고는, 1로 수렴하는 현상만을 선별하여 현실 세계로 구축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확률의 수렴 과정이 문제가 된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가끔 글자를 휙 지나가며 읽다 보면 잘못 읽는 경우가 있다. '검'이란 글자를 '감'으로 봤다던지 하는 그런 경우... 이럴 때 우리는 글자가 제멋대로 바뀌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재차 확인해보고 '검'으로 보이면 '검'을 '감'으로, '감'으로 보면 '감'을 '검'으로 잘못 봤다고 받아들인다.
기대의 만족이라는 것이 대부분 선행된 되풀이의 범위 내에서 쌓이는데, 모든 사람은 죽더라는 것과 죽은 사람은 살아나지 않더라, 한번 쓰여진 글자는 바뀌지 않더라 따위가 그에 해당된다. 재미있는 것은 일단 어떤 기대가 형성되면 그 기대에 위배되는 현상을 경험할 경우, 그 경험은 그동안 쌓아가던 되풀이의 데이터에 추가시키지 않음으로써 기대를 보존한다는 것이다. 한번 종이에 쓰여진 글자는 저절로 다른 글자로 바뀌지 않는다고 기대하게 되면, 글자가 바뀌는 경험을 아무리 많이 해도, 매번 '그냥 잘못 봤다'라고 인식하게 되지, 글자가 바뀐 경험의 데이터를 축적해가면서 '글자가 바뀔 수도 있다'는 기대를 쌓아올리지 않는다. 게다가 교육을 통한 기대의 세습 작용도 이에 일조한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는 경우는 없다고 알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사람이 죽었다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나타났던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모든 데이터들을 그 자리에서 제거해버림으로써, 보존된 데이터들로만 자기 모순이 없는 결론을 내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대부분 '비현실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현실에 대한 의심'보다는 '인식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는데, 어쩌면 현실이야말로 의심 받아야 할 제일의 대상일지 모른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현대 과학이 지닌 보이지 않는 위험이 놓여있다.
2003. 12. 14.
@ 이런 글을 쓰긴 쓴다만 사실 이런 글을 쓰고 나면 뭐, 딱히 과학에 대한 불신이 생긴다기 보다는 '철학은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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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문제는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이 정확할 것입니다. 뇌는 애매하기 짝이 없고, 감각기관으로부터 2차원, 1차원적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를, 우리가 딛고 있는 3차원 세계에 맞게 변화시키면서 많은 착각을 만들죠. 신체의 감각기관이 현실세계의 움직임을 다 수용할만큼 성능이 좋지 않기 때문에, 뇌는 부족한 부분을 마음대로 상상해서 만들어 붙인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 자신이 이전에 경험했거나, 알고 있는대로 해석해서 합리화 시키는 일이 생기는 것이죠. 물론 그것이 개체의 보호를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뇌의 착각이 더 큰 이유일겁니다. :)
아마도, 우리가 보는 세계는 실제 세계와 많든 조금이든 다를 것입니다. ㅎㅎ
'인식이 현실을 배반한다'는 말로 이해가 되는데 맞나요? ^^,,
보여지는것 조차 자기 원하는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싶어하는것이 인간인데, 약간의 조작이라도 가해진다면 그 결과는 볼 필요도 없겠죠..
'역시 진리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믿는 게 속편한 거 같습니다. ㅡㅠ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