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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2 완벽한 회색에 담긴 추방과 탈주 (3)
1월말 어머니랑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칙코리아 존맥러플린 파이브 피스 밴드 공연을 보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 누나에게 전해줄 것이 있어서 공연을 보기 전에 잠깐 얼굴만 봤는데 나더러 읽으라며 책을 한권 건네준 것이 <추방과 탈주>였다.

책을 선물 받은 후 읽기를 이래저래 미루기를 근 한달, 그러다가 책장에 꽂혀 있던 이 책을 뽑아든 건 병원에 입원할 일이 생긴 2월말에서나였다. 지루하기 짝이없는 병원이라는 환경 탓일 수도 있겠지만, 관심있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책이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책은 정부가, (신)자유주라는 이름으로, 자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약자들을 어떻게 정부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로 "추방"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반한다.

2001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6년반만에 귀국하여 시작한 한국에서의 반(半)사회생활은--직장이 학교에 있다보니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과는 그래도 조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숨막힐 것 같았다. 유학을 가기 전에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몰랐던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자리를 비운 6년반 동안 한국 사회의 페이스는 엄청나게 빨라져 있었다. 다양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의 그런 숨넘어가게 빠른 페이스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귀국을 결심한 입장에서, 이런 한국의 풍경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그 변화의 폭이 더 크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 충격도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본이 제1의 가치로 자리 잡은 소위 자유시장을 정부가 방치함으로써,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자본을 향한 맹목적인 추격과 쟁탈을 할 때, 그 대열에서 낙오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소멸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경험의 빈자리를 그 충격만으로 메울 수는 없는 일이기에, 그런 경험 위에서 싹튼 이 책의 문제의식은 내게 부족했던 부분을 어느 정도 메워주었다.

그렇지만 내가 정작 이책에서 주목한 부분은 촛불의 승패와 관련하여 이야기한 "과정 중의 존재"라는 대목이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선택은 결국은 '완벽한 회색'을 찾는 일에 불과하다고 믿는 입장에서 고병권 선생님이 언급한 탈주조차도 완벽한 회색 찾기에 불과해 보인다. 그렇지만 '과정 중의 존재'인 우리가 '도대체 뭘 하는 과정'인지를 이해한다면 '완벽한 회색' 찾기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완벽한 회색'이라니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완벽한 검은색이란 명도도 채도도 없는 색을 말한다. 그리고 완벽한 흰색이란 채도는 없지만 명도가 최대인 색을 말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명도에 따라 온갖 회색(all shades of gray)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 딱 하나를 골라 '완벽한 회색'이라 말한다는 건 대체 얼마나 임의적이란 말인가?

정부를 향해 촛불"시위"를 하는 동안 우리는 정부에 다양한 요구를 했다. 촛불시위의 시발점이 된 쇠고기 수입 반대부터, 공기업 및 의료보험의 민영화 반대, 한미 FTA 철회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쌓였던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다각도로 표출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그 자리에 모여서 정부를 규탄한 사람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갖는 '같은 편'이 아니고, 정부는 그런 대규모 시위에 원인을 제공한 '반대 편'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많은 사회 이슈를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이라는 대척점에 서있는 두 그룹간의 이해관계 충돌로 문제를 해석하고, 이들은 철저하게 다른 이념과 사고의 기본 전제 위에서 서로의 주장을 펼치며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애쓴다고 생각하지만 그 첨예한 대립의 이면에 숨어있는 유사성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자유주의가 철저한 자본의 논리에 사람들의 삶이 잠식 당하는 것을 정부는 수수방관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반대점에 그런 자본과 시장의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이윤추구에의 본능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현실적으로는 정부라는 형태를 빌어서--억제하는 것을 사회주의라고 했을 때, 사실 그 사이에 폭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극렬한 자유주의자들도 사실 무자비한 이윤 추구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전혀 없어야 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럴 경우 폭력적 자금 회수를 동반한 고리대금업이나 어린 아이들을 미끼로 하는 앵벌이 따위의 기본적인 인권이 자본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고, 일정 정도의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반면에 사회주의의 경우 아무리 현명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다양하게 변하는 경제 변수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경제 참여 주체에게 일정 정도의 자유를 부여하지 않을 경우 경제 시스템 자체가 붕괴될 수밖에 없다. 경제 활동의 어떤 부분은 정부가 관리할 필요가 있고, 또 어떤 부분은 시장 참여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맡겨둬야 한다.

결국 문제를 '국가냐, 시장이냐'의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일 경우, 이는 표면적으로는 양자택일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를 시장에 맡겨두면 되고, 정부가 어디까지 개입해야하는지 선을 긋기는 그어야겠는데, 이 선을 어디에 긋느냐는 단 한가지를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된다. 그리고 그 답은 누구에게 묻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임의성을 띌 수밖에 없다. 이 폭넓은 스펙트럼의 어딘가에 다양한 갈등관계가 해소되는 단 한 지점이 존재하고, 그 지점에서 좌우로 살짝만 벗어나면 온갖 사회/경제적 문제에 노출될 거라고 믿는 건 명도가 어떤 특정한 값을 가질 때에만 '완벽한 회색'이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개별적 이슈--미국과 FTA를 체결해야 하느냐 따위의--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의 두 그룹으로 사람들을 나눌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개인에게 앞서 말한 스펙트럼 상에서 어디에 선을 긋겠냐고--정부가 어디까지 시장에 개입하는 게 좋겠느냐고--묻는다면 그 답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개인이 그 선을 어디에 그었느냐는 그 개인이 소유한 경험의 범위와 그 개인이 처한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 어떤 진실을 찾는 건 '완벽한 회색'을 고르는 일처럼 제멋대로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실제 우리 삶에 녹아 있는 문제들은 회색을 고르듯 변수가 명도 단 하나뿐인 1차원적인 문제가 아니다. 다양한 변수들을 축으로 하는 다차원적 공간 상에서 한 점을 고르는 일이다.

고병권 선생님은 '국가냐, 시장이냐'의 나쁜 선택지에서 벗어나는 싸움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이는 결국은 '국가와 시장'마저도 포함한 그 드넓은 공간 안에서 한 점을 고르는 일이다. 나는 나대로 한 점을, 너는 너대로 한 점을 고를 때, 누구나 그 점을 고른 이유가 있겠지만, 나의 이유들이란 내게는 납득이 가지만 네겐 이해할 수 없는, 너의 이유들이란 내겐 납득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설령 나의 이유를 네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두개의 임의적인 선택이 우연히 일치한 것이지, 그점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회적 선택에 의해 생겨나고 그 사회의 사각으로 추방되는 약자가 존재하지 않는 인간사의 진실 따위는 없기 때문에 어떤 점을 선택하든 아무 의미가 없다거나 아무런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 다른 회색들을 선택하며 한 회색에서 다른 회색으로 뛰어다녀야 한다.

촛불의 승패가 고병권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과정 중의 존재"임을 이해하는 데에서 갈리는 것은, 더 크게는 우리 삶 자체가 과정 중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완벽한 회색"이 존재하지 않듯, 강자에 의한 약자의 추방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결단 따위는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쇠고기 수입 취소 따의처럼 개별적 사안에 대해서 "여기까지만 쟁취하면 승리"라는 승패에 대한 분별적 인식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합의가 어떤 사람들을 어떻게 왜 추방하게 됐는가를 끊임없이 살피는 데에 있다. 우리가 선택한 회색이 추방한 사람들을 안고 가기 위해, 또 조금 다른 회색을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람이 추방되고, 또 다른 회색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내가 추방되기도 하고, 그렇게 추방의 순환이 일어난다.

그래서 내게 의미있는 탈주란 타인을 향한 애정은 그런 추방의 순환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이는 일과 동치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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