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있을 땐 TV를 참 열심히 봤다. 요새 국내에도 미드가 많이 소개되는데 참 볼만한 것들이 많았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Deadwood, The Wire, Firefly 같은 프로그램에서부터 국내에도 꽤 많은 팬을 확보한 House, Dexter 까지. 거기다 시사 코메디쇼인 Jon Stewart Daily Show나 Colbert Report도 거의 매일 꼬박꼬박 챙겨봤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끄는 24(처음 세시즌은 열심히 봤다), Lost, Prison Break 등은 그다지 재미있는 줄 모르겠다.

확실히 내 취향은 한국인의 대중적 취향과는 빗나가는 것 같다. 미국에 있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아쉬운 부분 중 하나는 볼만한 TV 프로그램이 정말 없다는 거다. 요새 열심히 챙겨보는 TV 프로는 끽해야 100분 토론이다. 특히 정치 이야기가 나올 때면, 딴나라당의 딴소리에 혈압 오르는 재미가 너무 쏠쏠해서 도저히 못 끊겠다, 이건. ㅡㅠㅡ 그 외에는 채널들 돌려봐야 뭐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는 그나물에 그밥 버라이어티쇼들만 넘쳐난다. 근데 이게 뭐 그냥 사람들 여럿이 앉아서 잡담만 한다. 버라이어티쇼에 버라이어티가 없다. orz TV를 보는 일이 피로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한국은 내수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에 한국 경제의 활로는 수출에 있다는 말들을 자주 한다. 국내 내수시장 규모로는 현재의 국민총생산량을 소비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갑이 A라는 물건을 만들어 파는데, 동네에 A가 필요한 사람이 5명 밖에 없더라는 거다. 그러면 해법은 두가지가 있다. 5개를 만들어서 5개만 파는 방법이 그 하나다. 다른 한 가지는, 굳이 10개 판 돈을 벌어야겠다면, 옆동네에서 A가 필요한 사람을 5명 더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갑이 물건 10개를 팔아서 번 돈으로 같은 동네 사람들이 만든 다른 물건을 사서 쓸 경우, 결국 그 동네는 A 5개 만큼의 경제적 부를 축적한다는 이야기다. 즉,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한다면--내수시장이 엄청나게 낭비를 하지 않는 한--수출을 해야만 한다.

좁아터진 내수시장의 결정적인 문제는 그 시장 내의 소비자에게서 선택의 여지를 박탈해간다는 거다. 뭔 말인고 하니, 동일한 아이템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생산자가 n명이 있다면, 각 생산자에게 시장의 규모는 평균적으로 총시장의 1/n로 줄어든다는 이야기다. 이때 n이 꽤 크다면 시장의 규모가 너무 협소해서, 생산비가 많이 드는 생산자는 경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생산자의 수는 내수시장의 규모에 비례하게--꼭 정비례는 아니더라도 양의 상관관계를 갖게--마련이고, 작은 시장 내부의 소비자는 소수의 생산자들에게서 제공되는 제품들 중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민국 문화산업의 비극이 숨어있다. 사실 텔레비전, 전화기, 냉장고,  세탁기, 심지어는 옷이나 집 까지도 남들이랑 다 똑같은 걸 사용하더라도 삶이 근본적으로 빈곤해지진 않는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TV 프로그램, 영화를 보고,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시장 경제체제하에서 이런 컨텐트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애초에 이런 것들이 많은 소비자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본은 컨텐트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거다. 자본의 유일한 고민은 더 큰 자본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다. A가 잘 팔리면 A만 만들면 그뿐이지, A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B까지 만들어줄 이유 따위는 없다. 이런 체제는 다수의 취향과 다른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소비할 문화를 남겨주지 않고, 결국 시간이 지나다보면 취향이 다른 소수자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반강제적으로 같은 문화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취향을 닮아갈 것이다. 자본은 기본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으로 표현되는 양성 피드백을 통해서 몸집을 불려나간다.

경쟁적 자본주의를 숭배하기는 미국이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못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 결과로 미국도 최근에는 대중의 입맛에 맞는 reality tv show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가지 차이라면, 미국은 절대 다수의 입맛에 맞지 않는 문화라 할지라도 이를 생산해내고 이를 소화할 수 있는 시장의 규모가 있다는 거다. 그래서 다양한 문화 중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을 선택할 여지가 있고, 이때 자신과 취향이 동일한 소수자들끼리 연대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세력화를 통해 꾸준히 자신들이 즐기는 문화를 누군가는 생산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거다. 시장의 규모란 소비자의 머릿수로 결정될 뿐, 전체 시장 규모에 대한 비율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전체 국민의 극히 일부만이 소비할 뿐이라 할지라도 이를 생산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 시장의 규모가 없는 한국에서 문화적 다양성이 자리잡을 여지란 쥐똥만큼도 없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선 말이다.

@ 대한민국이 얼마나 소름끼치게 획일적이냐면, 이런 얘기만 해도 빨갱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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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광고와 관련하여 인종차별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하게 된 김에 인종차별 이면에 숨은 순혈주의/민족주의의 실체에 대해서도 논의를 해보는 게 건전하다고 판단 예전에 쓴 글을 옮겨본다.

2006. 3. 20

대한민국 헌법 제 13조 3항을 보면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근대 형법에 있어서 기본이랄 수 있는 형사처벌 개별화의 원칙에 따르면 너무도 당연한 이 조항은 제 5공화국에 들어서 8차 개헌을 통해 12조 3항에 삽입되었다가 현행헌법인 9차 개정 헌법에서는 13조 3항으로 옮겨진 조항이다.

냉전 시대에 남북이 대치한 현실은 정부의 반공주의를 통한 국민 통제의 유용한 도구로 쓰였다. 이는 '연좌제'와 맞물려 정부가 '사상범'에 대한 막강한 억지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현실'은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가 국민에게 휘두르는 연좌제라는 '특수한 권력'에 둔감하게 만든 거다.

그렇지만 '특수한 권력에 대한 둔감함'은 불행히도 '대한민국민'만의 일이 아니다. 연좌제가 실시된 기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찾아볼 수 있으며, 이가 제도적으로 금지된 오늘날에도 의식적 연좌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제노사이드나 인종차별, 종교전을 비롯한 모든 집단분쟁의 뿌리에는 연좌의식이 깔려있다. '집단'분쟁은 태생적으로 내가 속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이 규정할 때에야 일어나게 마련이고, 이런 집단의 규정은 연좌의식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동족, 동향사람, 동문, 동창 등등 '동질감'을 일깨우는 집합명사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은 연좌성이고, 이는 애국심, 애향심, 애교심 등 우리가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소위 긍정적 가치를 생산해낸다. 근데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문제는 우연적 연좌가 '특별한' 애정을 낳는다는 데에 있다. (애교심의 경우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연성이 덜 하기는 하다.)

우리는 인종차별이, 성차별이 나쁘다고 배우고,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인류 역사의 과오라고 배운다. 그 이유는 우리는 개인에게 선택권이 없는 외부적 조건들로 그 개인을 재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열등한' 유대인으로 태어나기를, 혹은 '우월한' 아리아인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내 어머니가 유대인인 것은 네 아버지가 독일인인 것만큼이나 우연에 불과하다.

집단적 특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김치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고, '많은' 프랑스인들이 점심시간을 2-3시간씩 즐기는 것도 사실이며, '많은' 콩고인들이 가난한 것 또한 사실이다. 중동에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유럽에 기독교인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는 '많은' 한국인들이 특별히 평화를 사랑하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집단도 그 집단의 구성원이 '모두' 착하거나, '모두' 나쁘지 않으며, '모두' 똑똑하거나, '모두' 멍청하지 않다. 그래서 '한강의 기적(이란 게 있다면 말이지)을 일으킨 한국인은 우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한국인 중에는 우수한 사람이 많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며, 그래서 '한국인은 우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비록 그게 칭찬일지라도 '유대인은 열등하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일이다. 내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내가 반드시 빨갱이인 것이 아니듯, 많은 한국인들이 우수하다고 내가 필연적으로 우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높은 개연성과 필연성은 그 결과의 발현에 있어서 무척 유사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매우 다르다.

우리는 국가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라고 배운다. 그렇지만 한국의 필리핀 노동자들에 대한 인종차별은, 한국인을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다. 우리가 특별히 더 사랑하고 가까이 해야할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 이타적인 한국 사람, 정직한 한국 사람, 자기 행동에 책임질 줄 아는 한국 사람이며, 이타적인 외국 사람, 정직한 외국 사람, 자기 행동에 책임질 줄 아는 외국 사람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람들은 외국 사람이 아니라 이기적인 외국 사람, 부도덕한 외국 사람, 무책임한 외국 사람이며, 이기적인 한국 사람, 부도덕한 한국 사람, 무책임한 한국 사람이다.

자기 이익만 챙기는,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한국 사람은 이타적이고 정직하며 책임감 있는 외국인들보다 더 위험하기 마련이다.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 야욕에 반대한 일본인보다 한국인 친일파가 더 위험했듯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국가라는 모호한 개념이나 '무조건 한국인'이 아니라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한국이 또 다시 누군가의 침략을 당한다면 이에 맞서 싸워야 하는 이유는 '한국'을 지켜야하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죄없는 이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침략 행위가 부당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한국이 누군가를 부당하게 침략한다면 이에 역시 맞서 싸우는 것 또한 도리.

다른 말로 하자면, '같은 한국인끼리 서로 위하는 게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한다면 '같은 지구인끼리 서로 위하는 것 역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나'라는 개인이기 전에 한국인이라면, 나는 한국인이기 전에 '지구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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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논리적 오류 중 하나는 명제와 그 역명제의 참/거짓 관계를 혼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1) 고래는 포유동물이다. 2) 포유동물은 고래이다. 1)과 2)는 상호 역명제 관계에 있는 명제들로 1)은 참, 2)는 거짓이다. 비교적 간단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명제가 참이라고 해서 그 역명제가 반드시 참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상호 역명제 관계의 두 명제는 동일한 선언문이 아니다.

그러면 '3) 포유동물이 아니면 고래가 아니다'와 '4) 고래가 아니면 포유동물이 아니다'라는 명제들을 생각해보자. 3)과 4) 역시 상호 역명제로 3)은 참, 4)는 거짓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1)과 3)은 상호 대우명제고 2)와 4)는 상호 대우명제로, 어떤 명제가 참이면 그 대우명제는 반드시 참이고, 어떤 명제가 거짓이면 그 대우명제는 반드시 거짓이다. 다시 말해 대우관계에 있는 두 명제는 반드시 동일한 선언문이다.

자, 그러면 다음의 명제들을 또 살펴보자. 5) 우유를 많이 마신 사람은 키가 크다. 6) 키가 큰 사람은 우유를 많이 마신다. 이거, 얼핏 보면 그게 그 이야기 같다. 그러나 5)와 6)은 서로 역관계이지 대우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둘 중 어느 하나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하나가 반드시 참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2006.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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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벨로님 블로그에서 격렬(?)하게 토론이 벌어지다가, 아무래도 벨로님은 이 주제로 길게 이야기하는 걸 즐기시지 않는 것 같아서 내 블로그로 다시 옮겨온다, 하핫. 주제는 '여성운동'. 뭐, 소모적 논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 구성원들 간의 입장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은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 중요한 디딤돌이 된다고 판단, 이런 논의는 언제나 환영하는 주인장,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수 없지. 추석도 다가오겠다, 이 기회에 정말 치밀하고 꼼꼼히 생각을 정리해볼까 한다. 추석이 무슨 상관이냐고? 읽어보시면 안다.

이야기의 발단은 얼마전 이글루스의 이오공감에 올라왔던 글 하나. 꽤나 점잖게 갈겨쓴 이 글의 이면에 숨은 남성중심적 사고관에 발끈한(?) 벨로님과 이야기를 해보니, 여성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좀 있었지만, 주인장은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수준이 아니란 생각이었는데 반해, 벨로님은 평행선을 달린다는 생각에 조금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기회에 그 간극을 보다 분명히 확인해볼까 한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그 어떤 사람의 의견도 환영하니 기꺼이 주인장 의견에 겐세이 놔줄 것을 희망하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

관심과 인내심, 시간이 있는 분들은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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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4일, 폴란드를 상대로 온국민적 염원인 월드컵에서의 1승을 거뒀다. 되지도 않는 걸, 홈팀이란 이점을 앞세워 억지로 억지로 올린 1승이 아니라, 시종일관 상대를 압도하며 비교적 쉬운 듯이(실제로 쉬웠을 리는 없다) 거둔 1승이라 그 다음 미국전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무척 커졌다. 실제 전력을 떠나서 축구의 본산지이자, 세계 축구의 주류인 유럽에서 나온 폴란드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축구 변방 미국을 상대하기에 앞서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승리에 대한 확신에 가까운 기대를 갖고 임한 6월 10일의 미국과의 일전은 그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1:1 무승부로 끝났다. 게다가 미국과의 일전에서 3:2로 무너졌던 포르투갈이 같은날 벌어진 폴란드전에 4골을 쏟아부으며 부활, 오는 14일 포르투갈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오늘의 무승부는 큰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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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 김에, 2002년 월드컵 당시에 써뒀던 관전평도 몇개 꺼내본다. 닭살스럽게 '월드컵2002의 감동을 다시 한번' 따위의 감성적인 구호를 외치겠다 그런 건 전혀 아니고, 당시에 공들여 썼던 기억이 나서 괜히 묻어두기 아까워서... ㅡㅠㅡ

한국 vs 폴란드 관전평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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