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American Life'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9/08 #339: Break-Up (3)
  2. 2008/03/25 보통 사람들의 위험한 욕망 (2)
일전에 소개한 바 있는 This American Life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유럽에 가 있는 2주 동안 못 듣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챙겨 들었는데 신기(?)하게도 두 방송분 중 하나가 Break-Up (실연, 이별, 이혼 등을 총칭하는 말인데 우리말로는 딱 일대일 대응되는 표현이 없는 듯).

This American Life 투고가 중 Starlee Kine이라는 아가씨가 있는데, 이 방송분에서 소개된 첫번째 에피소드는 Starlee Kine이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방황(?)하다가 스스로 Break-up song을 하나 쓰기로 결심, 곡을 쓰는 과정을 소개한 이야기. 그렇게 씌여진 곡은 여기서 들을 수 있다. (클릭)

물론 나의 경우야 연애하다 깨진 것도 아니고 혼자 속끓이는 (어찌보면 더 처량하고 한심한) 케이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가씨 이야길 듣고 있자니 어찌나 구구절절 공감이 가던지... ㅠ.ㅜ

사실 이 에피소드 타이밍이 더 골때리는 이유는, 유학 갔을 때 사귄 친구 한명을 이번에 확회 기간 동안 만났는데 이 친구가 또 7년 사귄 여자 친구랑 헤어져야 하나 고민하고 있더라는 거. 며칠 전에 이메일이 왔는데 결국은 헤어지기로 한 듯.

정작 하려던 이야기는 이번 방송분의 두번째 에피소드.

1987년 2월 11일, Noah Adams라는 양반이 진행하는 All Things Considered라는 미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뉴욕 맨하탄에 사는 8살짜리 소녀가 출연한다. 그녀의 이름은 Betsy Allison Walter. 사연인즉슨, 부모의 이혼을 어떻게든 막기를 원한 이 소녀가 당시 뉴욕 시장이던 Edward Koch에게 편지로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 라디오 프로그램 프로듀서들이 이 소녀를 초청한 것.

사실 부모의 이혼을 막길 원하는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입에 침이 고인 것을 채 삼키지도 못하는 듯한 어린 말투와 목소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조리있게 이야기하는 걸 듣노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안타깝지만, 이 사연을 들으면서 이 소녀에게 동정심을 갖게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른들의 쓸모없음'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 일단 Koch 시장의 답장을 살펴보자.

Thank you for the letter. I was saddened to learn of the difficult times you are experiencing now. It is important for you to share your feelings and thoughts with someone during this time. I wish there is….was an easy solution to these problems, but thee is not. Please remember that you are loved and that people care about you. All the best. Sincerely, Edward Koch.

어쩔 수 없이 정치인일 수밖에 없는 이 식상한 답변을 보라.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의 "이 답장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니?"라는 질문에 소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No"라고 대답한다. 그래도 이건 약과다.

이 아이는 뉴욕 시장 외에 Boys' and Girls' Book of Divorce라는 책의 작가/심리학자에게도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는데 이 심리학자라는 양반의 답이 또 걸작이다. 이 소녀의 표현을 빌리면, "Well, he said that I should try another of his books to find out help." -_-,, "내 책이나 사서 봐"라니, 이 무슨...

사실 Betsy가 직면한 문제의 본질은 '별 달리 뾰족한 답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어른들이 이런 문제를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크게 두가지다. 한가지는 "어린 아이는 세상의 어두운 면으로부터 철저하게 보호돼야 한다"는 발상이고, 또 다른 한가지는 "아이들이 이런 세상의 복잡함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답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답이 있는 척 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이 함정에 빠지고 나면, 이미 충분히 아이들에게 해줄 말이 없는 우리는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Noah Adams는 이 인터뷰가 있은 20년 후인 2007년에 Betsy Allison Walter를 다시 한번 자신의 프로그램에 초청한다. 만 29살의 그녀는--왠지 꽤나 잘 어울리게도--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그 옛날 인터뷰를 들을 때면, 그 당시 무슨 생각들을 했는지 아직도 정확히 기억이 난다는 그녀는--당시 인터뷰를 하던 Noah Adams도 자신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틀에박힌 어른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까지 물론 웃으며 전혀 악의없이 솔직하게 한다--지금의 Betsy가 그때 그 8살짜리 Betsy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무슨 말을 해주겠냐는 Adams의 질문의 무게를--게다가 초등학생 교육자이기 때문에 더더욱--온전히 느끼는 듯했다.

8살 소녀가 바라보는 부모의 이혼에 대한 진실 혹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미지와 29살 숙녀가 바라보는 부모의 이혼에 대한 진실 사이의 괴리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그녀는, 당시 자신은 실제 어른들 세계의 진실에 노출됐다더라면 이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고한다. 그러면서 8살의 Betsy에게 "부모의 이혼이라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 라는 질문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기 보다는, 그 질문은 그 사건의 당사자인 부모들이 충분히 고민했으리라 믿고 맡겨놓고 앞으로 그녀 스스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할 걸 부탁하겠다"고 대답한다.

8살짜리 Betsy는 그 대답이 여전히 진실을 회피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기에 충분한 답변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겠지만 적어도 무력감을 느끼지는 않을 대답을 해주고 싶다며...

시장과 심리학자란 사람들이 그녀에게 들려준 조언이란 것은 쓸모없기 짝이 없었지만, 그 덕분에 자신을 반복해서 8살로 되돌릴 수 있는 그 인터뷰 하나를 평생을 안고 살 수 있었던 건 그녀에게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인터뷰 내용을 듣고 있노라면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프다는 그녀는, 부모의 이혼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세월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 혹은 수 많은 다른 사람들도 겪는, 그렇지만 결국은 극복해내는 일'이라는 클리셰만을 반복해서 되뇌이는 이들이나, 부모의 이혼에 대한 어린 나이에 느끼던 막연한 불안, 슬픔 또 때로는 분노의 희미한 흔적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고민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할 수 있었을 테니까.

원래가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결국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전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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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의 라디오 프로그램 중 This American Life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매주 한가지 주제를 정해서 그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몇가지 글이나 인터뷰의 형태로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책벌레 스타일의(nerdy) 호스트 Ira Glass의 약간은 긴장된 듯한 목소리의 진행이 탁월한 주제선택과 편집과 맞물려 영어로된 라디오 매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즐겨 듣게 된다. (관심있는 분들은 http://www.thislife.org/에서 확인들 해보시라. 매주 월요일 무료 포드캐스트를 다운받을 수 있다.)

최근에 아주 재밌게 들은 내용은 2월 25일에 나간 테스토스테론을 주제로한 방송분이었다. 이날 방송된 에피소드 중 하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테스토스테론을 체내에서 한동안 제거했던 사람의 이야기, 남성전환을 위해 테스토스테론을 주입한 사람의 이야기, 이 프로그램의 제작진 전원(남자 다섯, 여자 넷)이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측정한 이야기, 그리고 십대 소년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특히 첫 에피소드가 흥미로왔다.

생식기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흔히들 남자들의 주책바가지 같은 성욕의 근원으로 알려진 테스토스테론은--일반적으로 남성들이 여성들에 비해 수십배 많아 남성호르몬이라고도 불린다--성적 욕망 이외의 인간의 욕망 대부분과 강한 연관성을 갖는다고 한다. 테스토스테론을 제거했던 남자는 그 동안 자신을 규정짓는 정체성--자신이 열정을 갖고 좋아하던 일들, 감정, 성격 등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완전히 소멸하는 경험을 했다고.

뭐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며, 하루에 몇시간씩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거나, 식빵에 마요네즈만 발라 먹어도 불편한 줄을 모르겠더란다. 한가지 또 재미있는 것은, 그 기간 동안 주변의 온갖 사소한 것들, 심지어는 남의 무릎의 수술자국까지 '아름답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름답다'는 인식이 이는 사물들에 대한 적극성을 갖는 감상이 아니라,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사물에 대한 단순한 묘사였다고.

예는 반증의 논거로써는 훌륭하지만, 증명의 논거로써 한 개인의 경험이나 단 한 가지 예는 형편없다는 걸 잘 알기에 '테스토스테론을 제거하면 우리가 인간의 오욕칠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2. 우리는 대부분 욕망을 달성함으로써--때로는 버림으로써--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해법으로, 그런 과정에는 '우리의 욕망이 사회적으로 어떤 맥락을 지니며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사유는 없다. 아주 가끔 내 욕망의 결과가 가까운 주변 사람의 이익과 대치될 때 갈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욕망이 사회정의와 어떻게 대치하는가에 대한 사유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회상류층 편입을 노리는 신분상승에 대한 개인적 욕망은--적어도 그 욕망을 가진 자가 인식하는--사회구조 내에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다. 바꿔말하면, 내가 고통받는 이유는 상류사회에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평등이 보장되지 않는 구조적 모순에 있다. 전자에 집중할 경우, 나의 고통은 신분상승을 통해 해소할 수도 있겠지만 (신분상승이 갈등의 해소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봤을 때, 고통 받는 다른 누군가가 어딘가에는 있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사실 욕망이란 것이 대체로 개인적 경험--돈/힘이 없어서 무시당해본 일이 있다거나 혹은 돈/힘 있는 사람을 보니 부럽더라 따위의 경험--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순식간에 발생하는 감정인데다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는 감정은 태생적으로 '무언가를 하면 된다'는 즉각적인 해법을 안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인이 그 욕망의 사회적 맥락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걸까?'라는 고민이래봐야  '너무너무 갖고 싶은 물건이 있어도 도둑질을 하다 잡히면 감옥에 간다' 같은 내 이익이 직결된 문제이거나, 간혹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해 친구를 짓밟거나, 팔아먹어야 한다거나 하는 개인 간의 이익이 대치될 경우 발생하는 기초적인 수준의 도덕성 범위 내의 갈등 정도다.

즉, 욕망을 둘러싼 갈등이 '내 욕망이 사회정의를 해치지 않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의 욕망 해소의 해법은 단순한만큼이나, 이런 개개인의 욕망은 항상 충돌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사회적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개개인이 신분상승을 노리는 것보다, 보다 본질적으로 사회계층 형성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는 내 행위를 제거하는 것이 원칙적으로는 올바른 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타자의 욕망이 항상 나의 그런 노력을 짓밟기 때문에 어려워진다. 사기꾼이 딱 한 사람만 있어도 '정직한 사람은(만) 손해를 보는 거'라 정직해지지 않는 게 현명한 선택이 된다.


3. 그래도 정직하고 우직한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리고 많은 보통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행실에 감동한다. 내 자식에게는 집 한칸이라도 물려주려고 그렇게 애쓰는 사람들도, 몇십억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기부한 시골의 웬 할머니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감동한다. 다만 감동만 하고 말 뿐이다.

서울에서 카이스트보다 훨씬 등록금이 비싼 대학을 다니며 수없이 과외를 해서 자기 학비, 생활비 벌어서 쓰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왜 안 그랬을까? 학비가 공짜라는 이유로, 경제적 자립능력이 없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집에서 주는 용돈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썼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너무너무 부끄럽다. 그런데 이렇게 부끄럽게 살았는데도, 주변에서 나한테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어째서 하나도 없을까? 오히려 그걸 부끄러워하는 나의 결벽증(?)을 보고 가족들은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라며 역정만 낸다.

다른 사람의 꼿꼿한 원칙엔 감동하는 가족들에게, 왜 내 뒤늦은 후회는 쓸데없는 고집이 되는 걸까? 왜냐하면 그 할머니가 실천한 사회정의를 내가 실천했을 때 돌아오는 직접적인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건희가 이재용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순간 막심한 손해로 되돌아올 뿐이다.

우리가 단돈 몇푼이라도 죽기전에 사회에 환원하지 못하는 건, 그 할머니가 손수 보여준 삶의 원칙이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원칙이 너무도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원칙은 60억이나 있는 사람이 실천했을 때에나 효과적이라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일이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60억을 기부한 사람을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이상, 그런 사람을 보며 스스로 그러지 못하는 자기자신을 부끄러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통 사람은 특별히 잘난 사람과는 다르다는 생각, 그래서 보통 사람이 무서운 거다. '특별해지기' 위해서는 신분상승을 해야만 하는 자기분열적인 모순에 빠진 보통 사람들 말이다.


4. 테스토스테론이 사라지니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와졌다던 아까 그 사람, 그 당시를 기묘하게 흐뭇하더라고 회고한다. 욕망을 없애기 위해 테스토스테론을 없애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이한 흐뭇함이 무엇일까라는 호기심, 욕망이 없는 상태에 대한 욕망은 가져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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